비신 높이 320㎝, 너비 110㎝, 두께 45㎝. 1990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장기석의 자는 진여(振汝), 호는 자하(紫下),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1860년(철종 11)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때 비분강개하여 항일의식을 향중사회에 고취하던차 11월 경찰로부터 국경(國慶) 반대자로 지목받아 12월 7일 성주경찰서에 갇힌 뒤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1911년 1월 5일 옥중에서 순절할 때까지 식음을 거부한 채 일제의 잔혹한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그 후 유림사회에서는 장의사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伯夷叔齊百世淸風碑(백이숙제백세청풍비)’를 모방하여 1936년에 ‘海東淸風(해동청풍)’이란 글자만 새겨 고향인 자양산 밑에 세웠다.
그러나 1937년 4월 일본경찰이 파괴하고 개천에 버린 것을 1946년에 도내유림과 향중인사의 발의로 파괴된 비편을 모아 김창숙(金昌淑)이 글을 지어 김구(金九)의 글씨로 복원되었다.
석재는 화강암이고 이수(螭首)는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고, 비신대좌는 시멘트로 되어 있다. 그 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그 주인공인 장기석의 충의와 절개, 일경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 수습하여 복원하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