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민은 전근대시기 읍락(邑落)에 거주했던 재지 지배층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한서』 식화지에 처음으로 보이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확인된다. 일반민과 구분되는 부유한 상층민으로 호인(豪人)·호부인(豪富人)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읍락의 공동체적인 질서가 해체되어 구성원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면서 등장하였다. 군역 동원과 군량 보급의 실질적 관장, 궁실 수리나 축성 등에 필요한 공역(公役)·공과(公課)의 수취에 참여하였다. 삼국항쟁 과정에서 인적·물적 자원의 효과적 동원에 실질적 역할을 수행했던 촌주의 모습으로 분화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호민의 용례는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처음으로 보이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논형(論衡)』 등의 중국사서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서 확인된다. 호인(豪人) · 호부인(豪富人)으로도 나타난다.
호민은 우리나라 초기국가 발전과정에서 읍락의 공동체적인 질서가 해체되어 구성원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면서 등장하였다. 부여처럼 연맹왕이 대두하던 단계에서 연맹체제에 참여한 중앙 귀족층인 대가(大加)가 자신의 세력기반인 읍락에 대한 지배를 호민을 매개로 했기 때문에, 호민은 읍락 안에서 그 구성원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신분층이었다. 호민을 부여와 같은 연맹왕국체제에 등장한 존재로 상정할 때, 고구려의 호민은 『삼국지』 동이전의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인이 된다. 하호가 식량 · 고기 · 소금을 운반해 공급한다.”라는 기록에 보이는 좌식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존재였다.
실제로 동천왕(東川王) 때 위(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입하자, 전공을 세워 사자(使者)가 된 유유(紐由)처럼 전문 행정 및 군사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뒤에 을불(乙弗)이 미천왕(美川王)으로 등극하기 전, 봉상왕(烽上王)의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을불을 용작(傭作)한 수실촌(水室村)의 음모(陰牟)와 같이 용작민이나 노비를 생산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도 보인다.
부여보다 사회발전이 늦게 진행되었던 삼한의 경우, 낙랑군에 조알(朝謁)하며, 의책(衣幘) · 인수(印綏)를 스스로 입은 하호 천여 명은 부여의 호민과 맥이 닿는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10년(293)조의 ‘사벌주(沙伐州)의 호민이 군사적 요충지인 사도성(沙道城)의 개축과 함께 이주하는’ 기록을 통해 이들이 사도성의 성주를 도와 군역 동원과 전투에 임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 동이전의 부여전에는 “읍락에는 호민과 민(民)인 하호, 그리고 노복(奴僕)이 존재하였다”고 하여, 3세기 무렵 부여의 읍락사회는 호민과 일반민인 하호, 그리고 노비가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호민에 대한 연구는 주로 하호와 관련된 호민의 사회경제적 성격이 고찰되었다. 홍승기(洪承基)는 호민을 크게 보아 지배계급이지만, 제가(諸加)와 구분되는 존재로 통솔 범위는 자연촌락으로 극히 제한된 것이라 하였다. 노태돈(盧泰敦)은 호민을 부내부(部內部)의 신분계층으로서 부내부장(部內部長) 및 그의 친족과 상인층, 철야장(鐵冶匠) 등으로 거론하였다. 북한학계는 부여사회의 계급분화과정에서 지배계급에 귀족 · 호민, 피지배계급에 하호 · 노예를 상정하고, 호민은 생산수단을 자영 소농민보다 많이 소유하며, 타인의 노동을 착취, 두루 감시하는 자로 보았다.
중국 정사(正史)에서 호민은 ‘재산이 많고 세력이 있는 백성’, ‘평민 신분의 부호(富豪)’, 또는 ‘세력이 있는 민(民)’으로서 하호(下戶) 내지 일반민과 구분되는 부유한 상층민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호민전(豪民田)을 바탕으로 외적 방비에 필요한 조부(租賦)의 부족분이나 재난으로 인한 빈민의 구휼(救恤), 진대(賑貸)를 보조하였다. 또한 중앙의 행정력과 밀착해 호민부고(豪民富賈)와 같이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주변 종족에 보이는 호민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공납(貢納) 업무를 관장하며, 자신의 읍락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보장받았다.
한편, 삼한의 읍락을 신라의 국가적 입장에서 새로이 편성한 행정 단위가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촌(村)이었다. 호민이 전쟁시 군역 동원과 군량 보급의 실질적 관장, 궁실 수리나 축성 등에 필요한 공역(公役) · 공과(公課)의 수취에 참여함으로써 국가의 행정에 조력했던 역할은 신라 중고기의 기층사회에서 촌주(村主)가 담당했던 것과 성격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삼국시대 초기의 읍락 호민 가운데는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재지 세력으로 남아, 장기간의 삼국항쟁 과정에서 신라 국가의 기반이 되었던 인적 · 물적 자원의 효과적 동원에 실질적 역할을 수행했던 촌주의 모습으로 분화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