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 출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1902년에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07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사건인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다. 출옥 후, 선천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이승훈(李昇薰)의 지도로 동료 교원 김지웅(金志雄)·양준명(梁濬明), 목사 김석창(金錫昌) 등과 선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성경 과목을 맡았던 그는 1919년 3월 1일 성경 시간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부름으로써 만세시위의 불을 당겼다. 그 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지시로 오동진(吳東振)·김승만(金承萬) 등과 함께 남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였다.
그 뒤 상해임시정부의 교통국(交通局) 안동지부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점으로 통신 연락 사무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한 사이 밀정 김극전(金克田)의 밀고로 1920년 1월 황대벽·장재순·김기준 등과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에 복역중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