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행궁 ( )

목차
관련 정보
수원 화성행궁 전경
수원 화성행궁 전경
건축
유적
문화재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가 능행할 목적으로 건립한 궁궐. 사적.
목차
정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가 능행할 목적으로 건립한 궁궐. 사적.
개설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정조가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내용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복원공사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참고문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한국의 건축문화재–2 경기편』(김홍식.김왕직, 기문당, 2012)
『화성행궁 복원보고서』(수원시, 2002)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김왕직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