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북계(北界)의 청천강 유역에서 압록강변의 국경지대로 향하는 역로망이다.
『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站驛)에, “흥화도(興化道)는 29개의 역을 관할한다. 장녕(長寧)[박주(博州, 평안북도 박천군)], 안신(安信)[가주(嘉州, 평안북도 박천군)], 신안(新安)·운흥(雲興)[곽주(郭州, 평안북도 정주시)], 임반(林畔)·통양(通陽)[선주(宣州, 평안북도 선천군)], 풍양(豐陽)[철주(鐵州, 평안북도 철산군)], 광지(光池)[영주(靈州, 평안북도 신의주시)], 창태(昌泰)[영덕(寧德, 평안북도 피현군)], 압록(鴨綠)[정주(靜州, 평안북도 의주군)], 회원(會元)[의주(義州, 평안북도 의주군)], 명구(名駒)[용주(龍州, 평안북도 용천군)], 영기(靈騏)[인주(麟州, 평안북도 신의주시)], 종화(從化)[위원(威遠, 평안북도 의주군)], 장흥(長興)[태주(泰州, 평안북도 태천군)], 성양(城陽)·삼기(三妓)·통의(通義)·대평(大平)[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 보봉(寶峯)·회인(懷仁)[안의(安義, 평안북도 천마군)], 화전(花田)·임천(臨川)[정융(定戎, 평안북도 천마군)], 은암(銀嵒)·진전(榛田)[영삭(寧朔, 평안북도 태천군)], 암사(嵒舍)[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 방전(芳田)·창평(昌平)[삭주(朔州, 평안북도 삭주군)], 안부신역(安富新驛)[안융(安戎, 평안남도 문덕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흥화도에서 가장 먼저 열거된 장녕역이 황주(黃州)에 소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청천강 이북(以北)에 분포하는 흥화도의 역도망을 고려하여 일단 박주로 수정하였다. 또한 원문에 광지역(光池驛)의 소재지를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인 영주(寧州, 평안남도 안주시)라고 표기하였지만, 마찬가지로 흥화도의 분포 양상과 광지역 앞뒤에 있는 역의 소재지를 고려하여 흥화진(興化鎭)이 승격된 영주(靈州)의 오기(誤記)로 판단하였다.
흥화도는 북방 군사지대인 양계(兩界)의 주요 군진(軍鎭)으로 압록강 하구의 최일선에 자리하였던 흥화진의 지명을 사용한 역도 명칭이다. 995년(성종 14) 강동 6주의 획득으로 흥화진이 압록강 방어체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흥화도는 이후에 추진된 서북계(西北界) 개척의 역사적 의미와 군사도로의 역할을 포괄하는 역도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이 역도는 북계의 군사 중심지인 안북대도호부 영주에서 청천강을 건넌 지점에서 시작하였다. 주요 진출 방향으로는 황해안의 가주·곽주·선주 등을 따라 북진하여 의주 방면으로 향하는 경로와 가주에서 귀주나 태주 등의 내륙 고을을 거쳐 국경지대로 이르는 경로가 있다. 이 중 후자의 정융진·안의진·삭주 등의 내륙 군진으로 이르는 역로망은 대령강 이동(以東)의 운중도(雲中道)와 연계되어 중부 내륙 전선으로도 진출이 가능하였다.
고려시대 흥화도는 북계 영역 군사도로의 근간일 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의 정복왕조와의 교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흥화도가 개경에서 서북 방면으로의 간선 교통로인 만큼, 『고려사』 기록의 오류나 역·역로의 위치 비정 등에 관한 향후의 고찰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