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상 ()

합천 해인사 건칠 희랑대사 좌상
합천 해인사 건칠 희랑대사 좌상
조각
개념
조사의 모습을 표현한 불교조각. 승려상.
이칭
이칭
승려상
정의
조사의 모습을 표현한 불교조각. 승려상.
개설

조사란 후세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받을 만한 승려이거나, 불교 종파를 개창했던 사람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큰 사찰을 창건한 승려까지 포함한다. 조사의 개념은 현교(顯敎)와 밀교(密敎),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에서 모두 통용된다. 조사의 수는 선종과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진언종(眞言宗), 정토종(淨土宗) 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의 선종과 교종에서도 신봉하는 조사가 각기 다르다. 선종에서는 인도의 28조사와 중국의 6조사를 모셨는데, 이중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인도의 28번째 조사이자 중국의 첫 번째 조사이기 때문에 선종에서 신봉하는 조사는 33인이 된다. 선종에서는 달마대사와 육조 혜능대사(六祖慧能大師)를 가장 중요시한다. 우리나라 승려로는 통일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개창했던 승려들과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나옹화상(懶翁和尙), 조선시대의 휴정대사(休靜大師) 등이 선종 조사로 신봉된다. 한편 교종의 조사로는 신라시대의 자장율사(慈藏律師),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등이 있다.

승가(僧家)에서는 스님이 입적하면 승사리(僧舍利)를 봉안하기 위한 부도(浮屠)를 세우고, 영정(影幀)을 모시기 위한 조사당(祖師堂)을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조사당에 조사상이 봉안된 예가 없는 것은 불상의 조성보다 수행에 중점을 둔 선종의 성격과 관련된다. 조사상은 없으나 그 정신을 보여주는 조사당의 대표적인 예로는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조사당과 경기도 여주 신륵사(神勒寺) 조사당이 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 승려가 입적한 후 그 모습을 만든 최초의 예는 서진(西晉)시대의 승랑상(僧郞像)이다. 승랑상은 선종 조사상이라기 보다 단순히 스님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 조사상은 조사의 개념이 성립된 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24조사상을 언급하고 있는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연흥(延興) 2년(472)에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에 의해 찬술된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은 중국에서 조사상 조성에 근거를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 24조사상은 이후 중국 선종의 28조사의 근거가 되었다.

현존하는 중국의 조사상으로는 북위(北魏)의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운강(雲岡)석굴 18굴의 조사상, 수(隋) 개황(開皇) 9년(589)의 안양(安陽) 대주성굴(大住聖窟) 굴문 안쪽 벽면에 음각된 24존의 전법조사상(傳法祖師像), 당(唐)의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낙양(洛陽)의 용문석굴(龍門石窟) 뇌고대중동(擂鼓臺中洞)의 25조사 부조상, 용문석굴 간경사동(看經寺洞)의 29조사 부조상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사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원효(元曉)대사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薛聰)이 다비(茶毘)한 후 남은 뼈를 부수어 진흙과 섞어 상을 만들어 분황사(芬皇寺)에 모셨다는 내용이다. 경주 흥륜사(興輪寺)의 금당에 아도(阿道), 의상(義湘) 등 십성(十聖)의 소조상을 봉안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경주 석굴암[석불사(石佛寺)] 벽면에 새겨진 10존의 제자상은 용문석굴 뇌고대중동과 간경사동의 전법조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기 때문에 전법조사상의 개념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조사당[조당(祖堂)]은 남아 있지만, 조사상의 실체를 알려줄 만한 자료는 거의 없다.

내용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석씨요람(釋氏要覽)』, 『불조통기(佛祖統紀)』, 『연등회요(聯燈會要)』 등에 의하면, 한 종파를 창시하거나 하나의 학문을 이룬 스승을 조사라고 하며, 그 모습을 조사상이라고 한다. 조사상을 모신 곳을 조사당 혹은 조당이라고 하고, 저술한 책을 조서(祖書)라 하며, 조사가 머무는 산을 조산(祖山)이라고 한다.

나한이 석가모니불이 인간 세상에 계실 때에 제자였던 분이라면, 조사는 석가모니불의 법맥을 계승한 분들로, 석가모니불과 동시대에 살았거나, 후대이긴 하지만 그 가르침을 잘 받들어 새로운 학문적 입지를 개창한 분들을 말한다.

현황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희랑조사상(希郞祖師像)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조사상 중에서 가장 이른 예이다. 희랑조사는 고려 말 조선 초 화엄종(華嚴宗)의 북악파(北岳派)를 대표했던 승려이다. 얼굴 표정이나 마른 풍모는 특정한 승려을 모델로 한 듯하다. 고려시대의 예로는 서울 우이동 성불사(成佛寺)에서 출토되어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조상이 있는데, 움푹 팬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 주름진 얼굴 등은 역시 특정한 조사의 모습을 모델로 하여 조성한 듯하다.

한편 조선시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발생한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은 그나마 전해지던 조사상을 훼손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사찰의 중수와 함께 큰 사찰에서는 조사당을 따로 마련하였는데, 상(像)의 형태가 아닌 진영(眞影)의 모습으로 봉안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사상은 나한상과 비슷하지만, 실존하였던 승려를 모델로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한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조성되었다면, 조사상은 승려의 특징을 살려 섬세하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사상은 단순히 불교 존상으로서의 의미 외에도 우리나라 초상 조각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불조통기(佛祖統紀)』
『석씨요람(釋氏要覽)』
『연등회요(聯燈會要)』
『나한』(국립춘천박물관, 2003)
『고승 진영』(김형우, 대원사, 199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배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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