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금(中禁)은 목종 때 처음 기록에 나타난다. 강조(康兆)가 폐위된 목종을 살해하기 위하여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냈을 때 중금군(中禁軍)을 동원하려 한 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중금은 최소한 목종 때는 설치되어 있었다. 중금의 임무는 국왕과 왕실의 주요 인물들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전체 병력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고려사(高麗史)』「여복지(輿服志)」의위(儀衛)조의 위장(衛仗) 행렬을 보면, 중금의 병력 수는 평균 24~40명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12년 7월 임자조)에 중금의 임무를 “중금지임 어전통갈 기임비경 전차 필이용모단정 성음청량자차정(中禁之任 御前通喝 其任匪輕 前此 必以容貌端正 聲音淸亮者差定)”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금의 임무는 어전에서 통알(通喝)하는 것으로 그 임무가 가볍지 않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성음이 청량(淸亮)한 자를 뽑는다고 하였다. 중금의 임무가 꼭 중금군의 그것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국왕의 측근에서 근무하고 용모가 단정한 사람이 여기에 뽑혔을 것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중금에는 지휘관으로 지유(指諭)와 행수(行首)의 직책이 있었다. 의종조에 상정된 여러 위장 행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중금군에는 영지유(領指諭)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유들을 총괄하던 직책으로 여겨진다. 중금군은 좌·우 중금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려사』열전 박순필전(朴純弼傳)에 의하면 그는 의종 때 중금군을 지냈고 명종 때 좌중금지유(左中禁指諭)를 역임하였던 것으로 나온다. 좌중금지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중금지유(右中禁指諭)가 있었을 것이며, 중금군이 좌·우 중금군으로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