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조합인 대정권번(大正券番)에 오산홍(吳山紅)이라는 이름으로 기적(妓籍)을 둔 기생으로, 연농(硏農), 홍월(虹月)을 아호로 삼았다. 192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란화(墨蘭畵)로 수차례 입선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던 유명 서화기(書畵妓)이다.
1905년을 전후하여 인천에서 출생하였고 인천 영화여학교에서 3년간 수학했다. 어린 시절 부친의 사망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학교를 중퇴하고 열네 살 때부터 기생 수련을 받았다. 1920년대 기생 서화가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1920년대 후반 서화 수련을 위해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이후로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종교 생활에 힘쓴 것으로 여겨진다. 1963년 남침례교 사업을 위해 한문으로 성경문구를 쓴 서예작품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이 확인되었으나, 이후의 작품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귀숙은 김응원(金應元)과 김규진(金圭鎭)에게 1년여간 사군자를 중심으로 지도를 받았고, 1923년경부터는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을 사사했다.
김용진의 사군자는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의 화법에 영향을 받았다. 민영익은 중국에서의 망명생활 동안 상하이[上海]의 유명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묵란, 묵죽을 주로 그린 바 있는데, 많은 근대 작가들이 민영익의 난죽(蘭竹)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그의 화풍이 크게 유행했다. 오귀숙도 김용진의 문하에서 민영익의 죽보(竹譜)를 접하고 수련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용진과 함께 민영익 화풍[운미풍(芸楣風)]의 사군자의 국내 보급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생들은 주로 ‘앉은자리 그림[席畵]’이라 하여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재주를 선보일 수 있었던 화목인 사군자 수련을 하였는데, 특히 오귀숙은 김응원, 김규진과 같이 당대의 유명한 사군자 작가는 물론, 김용진을 스승으로 삼아 보다 전문적인 제작경향을 보였다.
오귀숙은 조선미술전람회 제3회에 「란(蘭)」(1924), 제4회 「춘란(春蘭)」, 「추국(秋菊)」(1925), 제5회 「묵란(墨蘭)」(1926)을 출품하여 연속 입선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중국 근대 서화가 오창석(吳昌碩)의 문인인 화가 방락(方洛)이 경성을 방문하여 오귀숙의 작품을 구입한 것이 군중에 회자되며 화명을 높였다. 특히 일본인 유명 서화가이자 조선미술전람회 서·사군자부 심사위원인 다구치 베이호[田口米舫]에게 극찬을 받으며 홍월(虹月)이라는 아호를 받았고, 이후 도쿄에서 그의 문하생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화풍으로는 민영익, 김용진의 묵란과 유사한 기법을 구사하여, 한 줄기에 여러 송이의 꽃이 피는 일경구화(一莖九華)의 난화(蘭花)와 끝이 몽톡하고 비수(肥瘦)의 변화가 적은 난엽(蘭葉)을 묘사했다. 잎은 농묵(濃墨)으로, 꽃과 꽃망울은 담묵(淡墨)으로 변화를 주었고 배경이 없는 화면에 두 세 무더기로 나누어 배치한 그의 묵란화는 군더더기 없이 힘차고 담백하게 표현되었다.
오귀숙은 1927년 이능화(李能和)가 기생의 역사에 대해 저술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도 서화에 능한 명기로 유일하게 소개되었다. 그러나 1930년 『매일신보』는 「옛날 로류장화 오늘 긔독신자-서화(書畵)로 이롬 놉든 기생(妓生) 홍월(虹月)은 어대로 갓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1929년부터 만국성서연구회에 가입하여 무명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성서를 팔러다닌다고 보도되었으며, 이후의 삶도 종교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