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숙(咸仁淑)은 평양에서 출생하여, 20세기 전반 특히 191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기생 출신의 서화가이다. 주소는 평양 관후리에 두었고, 기명은 비취였으며 죽서(竹西), 소교(小橋), 죽교(竹橋)의 아호를 썼다.
기생에게도 수업과정을 개방하여 근대기 여성 서화교육의 효시가 되었던 평양의 기성서화회(箕城書畵會)에서 서화를 수련했다. 함인숙은 1915년 9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평남관에서 기생인 임기화(林琪花)와 함께 관람객들이 청구하는 그림을 수응, 휘호한 기록이 있다. 그는 본래 사군자와 노안(蘆雁)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공진회에서도 그의 「노안[혹은 안진도(雁陳圖)]」이 전시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성에서 열린 가정박람회에서도 휘호했다. 이 박람회는 발생한 윤필료로 평남협찬회를 보조하고자 기획된 것이었고, 함인숙이 그 수입 중의 일부를 자선사업에 사용하기 위해 기탁했던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처럼 평양의 여류화가로 이름을 알린 함인숙은 이후 경성으로 활동영역을 옮긴 것 같다. 김규진이 경성 하세가와마치[長谷川町 : 현 소공동]에서 경영하던 서화연구회의 여성회원으로서, 일본인 여성, 사회 지도층 신여성, 그리고 여타의 기생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916년에는 평양 출신의 화가 양기훈(楊基薰)의 장남 양영진(楊英鎭)의 전시회에 작품을 내어 함께 전시했는데, 이때 『매일신보』는 함인숙을 ‘평양여류화가의 제일인(第一人)’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1920년에 열린 공업박람회 조선관에서 역시 평양 출신의 김유탁(金有鐸), 기생 화가 전춘홍(田春紅)과 휘호한 바 있다.
이처럼 함인숙은 1910년대 각종 박람회, 전국 각지로 확대된 서화회에서 관람객에게 작품을 휘호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유명인사였다. 일부 현전 작품으로 미루어보아 김규진의 난죽법에 영향받은 사군자화를 남기고 있음이 확인되나, 1920년대 이후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