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도」는 1931년 근대기 여성 작가 정찬영이 공작을 그린 수묵채색화이다. 정찬영은 경성여자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채색화로 명성을 얻은 이영일을 사사했다. 이 작품은 1931년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이다. 소나무와 공작 한 쌍을 복고적이고도 화려한 색감으로 묘사되어 있다. 소나무는 화면의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줄기가 뻗어있다. 공작은 긴 꼬리깃을 반대편으로 드리워 교차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화면 왼쪽 하단에 ‘찬영’의 낙관이 있다. 「공작도」는 근대기 채색화조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44.2㎝, 가로 49.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공작도(孔雀圖)」는 1931년 제1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이다. 정찬영의 작품이 대개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드물게 현전하는 근대기 채색화조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정찬영(鄭燦英)은 1906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경성여자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으며, 채색화로 명성을 얻었던 이영일(李英一)을 사사했다. 스승 이영일이 일본 유학을 통해 익힌 일본화의 기법들을 충실히 계승하여, 근대기 채색화단의 주요 여성작가로 성장하였다.
정찬영은 공작을 포함하여 백로나 꿩과 같은 화조, 또는 인물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는데, 「공작도」에서도 소나무와 공작 한 쌍을 원체화풍(院體畵風)의 복고적이고도 화려한 색감으로 묘사하였다. 소나무는 화면의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줄기가 뻗어있고, 공작은 긴 꼬리깃을 반대편으로 드리워 교차함으로써 전반적으로는 안정감 있고 짜임새 있는 구도를 설정하였다. 또한 소나무 둥치는 윤필과 갈필의 먹을 적절히 사용하여 수묵화와 같은 느낌을 주어, 공작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녹색과 청색의 화려한 색채가 더욱 돋보인다. 더하여 청록 안료로 곳곳에 그려 넣은 나무 이끼는 나무와 공작, 수묵과 채색을 조화롭게 어우르는 역할을 한다.
정찬영이 「공작도」보다 수개월 앞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여광(麗光)」 역시 동일한 공작새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여광」은 당시의 언론을 통해 제작 정황 등이 잘 알려져 있는데, 「여광」은 공작새와 함께 소나무 대신, 흐드러지게 꽃을 틔운 순백의 목련을 묘사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초봄 막 털갈이를 끝낸 가장 아름다운 공작의 자태를 표현한 정교한 이 채색화는 정찬영에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여성작가로는 처음 특선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여광」을 그릴 때, 정찬영이 한 달 이상 창경원 공작새 우리 앞에서 스케치 했다는 언론보도를 미루어 보아, 정확한 사생에 기초를 둔 화조화의 창작과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화풍상으로는 스승 이영일이 일본에서 수학한 덴신도 화숙〔傳神洞畵塾〕 숙생(塾生)의 작품들과 동일한 소재 및 구도를 취하여 그 연원 및 영향관계를 짐작할 수 있으나, 현재 「여광」은 유실되어 작품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
한편 「공작도」는 채색화단과 근대기 자수와의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시대 후기부터 사실적인 자수표현이 시작되어, 자수가들의 회화적 표현은 도안의 수준을 뛰어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도쿄여자미술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 학생들의 「공작도충립(孔雀圖衝立)」(1915)과 같은 자수 작품들은 실사를 토대로 제작되었는데, 정찬영의 「공작도」, 「여광」과 유사한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이처럼 정찬영은 동양화단의 대표적 여성작가이자 문화인사로서 근대기에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일본화와의 직접적 영향관계에 있었던 채색화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함께, 남편 도봉섭(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학장)이 납북되고 네 자녀를 돌보게 되는 가정형편과 맞물려 이후로는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공작도」는 정찬영 본인이 오랫동안 보관해왔으나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화면의 왼쪽 하단에는 ‘찬영(燦英)’의 낙관이 관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