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복천암(福泉庵) 극락전의 주존불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로 배치된 삼존상이다. 복장기의 실물은 전하지 않는데 그 내용이 사적기 등에 전하고 있어서 조성 배경과 조성시기, 불상을 만든 조각장 등을 알 수 있다.
복천암의 원래 아미타삼존상은 복천암에 친행한 세조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나, 1733년에 발생한 화재로 법당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삼존상은 소실된 이후 1735년부터 1737년까지의 중창불사 때에 조성된 불상이다.
복천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높은 불단 위에 각각 중대석이 사각인 3단 연화좌 위에 봉안되어 있다. 본존상인 아미타불좌상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결하여 오른손은 어깨 위까지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으며 각기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얼굴에 살집이 있고 특히 코가 작고 양볼과 턱이 풍만하여 온후한 인상이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둥글게 감싼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속에 입은 편삼의 옷깃을 대의(大衣)의 왼쪽 단과 같은 형태로 입고 있다. 가슴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의 윗단이 보이는데, 윗부분이 주름져 있고 배부분이 볼록하다. 상체가 길쭉한 편이나 어깨는 작고 움츠린 자세이다. 불신(佛身)의 양감(量感)은 적당하고 옷 주름은 이에 걸맞게 적당히 투박하며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좌우 보살상은 거의 같은 모습이나 부분적으로 약간 차이를 두어 구별하고 있는데, 연꽃 가지를 들은 손이 반대여서 대칭을 이룬다. 보관(寶冠)은 모두 높고 화려한데, 관음상의 관띠가 조금 더 옆으로 많이 날린다. 보관 앞에는 작게 각각 화불(化佛)과 정병(淨甁)이 표현되어 있어서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을 구별할 수 있다. 보관 속으로 높게 묶은 보발을 볼 수 있고 일부 머리 가닥은 귀를 감아돌아 어깨 위로 늘어지고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본존상과 달리 아래턱의 살집이 적어서 갸름하고 단정한 인상이다. 왼쪽 관음보살상의 얼굴이 보다 여성적이고 예스러운 인상이다. 불신도 작으며 법의는 여래상과 같은 형식으로 입고 있다. 관음이 들고 있는 연꽃 가지 위에는 정병을 붙여서 구별을 하고 있다.
삼존상의 대좌는 크기만 조금 차이를 보일 뿐, 거의 같은 형태로 상단과 하단의 연판은 양감이 있으며 중대석 앞면에는 옆으로 긴 안상 안에 당초문(唐草紋)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현재 불상의 복장이 조사되지 않아서 복장기의 행방을 알 수 없지만 그 내용이 전해진다. 전해지고 있는 복장기 「충청좌도 보은현지동령 속리산복천사 미타좌우관음세지삼존불상 조성원문(忠淸左道報恩縣地東嶺俗離山福泉寺彌陀左右觀音勢至三尊佛像造成願文)」에 의하면, 복천사에 친행(親行)한 세조가 왕실의 안녕을 위해 혜각존자(慧覺尊者, 信眉)에게 불상 조성을 명하여 원래의 삼존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733년 겨울에 화재로 전각과 불상이 소멸되고 이후, 사찰의 스님인 천신(天信)과 담연(淡演)이 원을 세우고 1735년 가을에 양공(良工)을 불러 1737년 봄에 현재의 삼존상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불상을 만든 조각장(彫刻匠)은 연기(演機), 수양공 두책(首良工 斗策), 수성(守性), 초붕(超鵬), 수견(守堅), 광붕(廣鵬) 등이다.
복천사는 조선 왕실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던 사찰이다. 현재 목조 아미타여래 삼존상은 세조대에 조성되었던 불상은 아니지만, 복천사의 연혁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고 조각 기법도 단정하며, 조성시기와 조각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