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보살좌상은 부산지방 국토관리청이 시행하고 있는 낙동강 살리기 사업 제32공구 낙단보 통합관리센터 부지를 조성하던 중 발견되었다.
이 상은 가로 폭이 다소 넓은 편평한 바위 면에 얕은 부조로 새긴 보살 좌상으로, 머리에는 삼산형의 연화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꽃을 잡고 활짝 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보관은 3개의 꽃잎이 피어나듯 표현한 삼산형(三山形)의 연화 보관 형태이며, 보관의 표면에는 아무런 표식과 장식이 없다. 보관 아래로는 동글동글한 보발이, 어깨 위로는 길게 드리워진 보발 자락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보발 표현은 936년경의 논산 개태사지 석조보살입상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고 곳곳에 쪼아 내다 그만둔 흔적이 보이며 두광 좌측 편에는 새기다 만 화염이 확인된다. 두 겹의 원으로 두광 · 신광을 의도하고 그 주변을 화염으로 처리하려고 한 것은 하남 교산리 마애여래입상이나 고령 개포동 석조보살좌상의 광배와도 비교된다.
턱 선을 네모나게 굴린 방형의 얼굴에는 이목구비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특히 돌출된 이마, 눈꼬리 쪽으로 축 처진 눈썹, 버들잎 모양의 긴 눈, 방형의 낮은 코, 도톰하게 처리한 입술 등에서 인간미가 넘쳐난다. 목에는 두 겹 반원형의 독특한 삼도가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으로 연꽃 줄기를 잡고 있다. 연 줄기는 위로 올라가면서 연잎 부근에서 다시 두 가닥으로 갈라져 아래쪽에는 연봉이, 위쪽에는 만개한 연꽃이 표현되었다. 불신에는 옷 주름을 표현하지 않았고, 신체에 비해 팔은 왜소하게 처리하였다. 지물을 잡은 오른손은 사실적이고 섬려하게 표현한 반면, 왼손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어깨 폭에 비해 무릎 폭은 다소 좁은 편이며, 왼발 위를 오른발이 포갠 길상좌를 보여준다. 연화좌는 중앙의 보주형의 연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쳤으나 생동감이 떨어져 도식적이다.
이 마애보살좌상에 보이는 삼산형의 보관, 도드라지게 표현한 눈 · 코 · 입 등에서 살펴지는 개성 있는 상호(相好), 연약하게 처리한 팔의 곡선, 의도된 듯 과감하게 생략한 착의 형식, 그리고 평면적이면서도 도식적인 연화 대좌, 원형의 두광 · 신광의 표현, 쪼아낸 조각 수법 등은 977년(고려, 경종 2)에 중수된 경기도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1989년 지정)이나 985년(고려, 성종 4)에 제작된 고령 개포동 마애보살좌상, 동화사 염불암 마애보살유희좌상 등과 양식적으로 상통한다. 고령 개포동 마애보살좌상은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동화사 염불암 마애보살유희좌상은 1988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마애보살상은 비록 세부의 표현에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물을 잡은 손의 형태라든가 얼굴의 네모난 윤곽 등에서 981년(고려, 경종 6)에 조성된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좌상(보물, 1989년 지정)이나 평양 영명사 미륵보살좌상, 대구 동화사 염불암 마애보살상과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따라서 이 보살상도 장암리 마애보살상과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후반이나 늦어도 11세기 초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을 바라보는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로는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 여주 계신리 마애여래입상,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입상 등이 있다. 이러한 불상들이 조성된 장소는 오랜 시간 동안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삶의 터전인 강을 따라 펼쳐진 나지막한 구릉의 절벽은 당시 불교문화와 산악숭배 신앙이 융합된 장소로서 그 지역민들의 공덕 신앙을 표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즉, 예로부터 신성시되던 이곳에 불상을 새겨 마을의 수호와 강을 건너 왕래하던 그들의 안전과 수명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애보살상은 오랜 세월 땅속에 매몰되어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나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 대구 염불암 마애보살좌상 등 고려 전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양식과 도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변에 위치하여 고려 전기의 수운(水運)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