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은 박내현이 1956년에 그린 한국화이다. 이 작품은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판자집 같은 허름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시장 풍경을 묘사하였다. 색면의 윤곽선은 하얗게 남겨두는 네거티브 방식의 선 처리를 함으로써 선보다는 색면의 은은한 대비를 통해 화면에 긴장과 조화를 이끌어냈다. 여성 군상의 시장 풍경을 다룬 이 작품을 「노점A」, 남성 군상의 시장 풍경을 다룬 작품을 「노점B」로 구분한다. 「노점」은 입체파적 양식을 통해 화면의 추상성을 본격적으로 실험하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작이다.
종이에 수묵채색. 세로 267㎝, 가로 21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향(雨鄕) 박내현의 「노점」(1956)은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판자집 같은 허름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아이를 업고 함지박에 물건을 담아 시장에 팔러 나온 여인, 길 한가운데에 수레를 세우고 음식을 팔고 있는 여인, 함지박에 가득한 옥수수를 들고 담소를 나누는 여인 등을 다룬 서민들의 시장 풍경을 묘사하였다.
박내현은 1941년 22세 때 도쿄여자미술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 일본화부 사범과에 입학하여 1944년에 졸업하였다. 도쿄 유학시기에 제작한 「부인상」(1941)으로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으로 입선하였으며 1943년에는 검정색 기모노 차림의 일본 소녀를 모델로 한 「장(粧)」(1943)으로 다시 입선하였다. 전형적인 관전형 일본 인물화 또는 미인화 기법을 배웠던 박내현은 해방 후 일제 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한국화 수립의 요구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1950년대 박내현의 화풍은 김기창과 같이 입체파적 양식을 가미한 반추상화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박내현은 “1954년까지 여러 번의 부부전을 가졌지만 화조, 인물, 산수 등의 사실적인 묘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950년 이후 내 자신 사실 막다른 곳에 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농촌 피난살이 4년에 나의 화풍은 점차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1955년 환도하고 제5회전을 화신백화점에서 가졌다. 작품은 완전히 입체적인 표현으로 옮겨지고 오랜 시일 모사와도 같이 해온 사실적 표현을 떠나 형태와 구성을 중심으로 한 작풍으로 바뀌어갔다.(중략) 작품제작을 거듭하는 동안 시각의 복수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즉 시점을 다각도에 두는 표현으로 나가고 보니 작품은 점차로 추상성을 지니게 되어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닌 표현은 무언지 자신의 생리에 맞는 세계를 찾은 듯한 기쁨으로 제작이 계속되었다.”(「동양화의 추상화-자전적 미술론」, 『사상계』, 1965.12)라고 회고한 바 있다. 「노점」은 이러한 입체파적 양식을 통해 화면의 추상성을 본격적으로 실험하기 시작한 시기의 대표작이다.
서민들의 시장 풍경은 박내현과 김기창의 군산 피난시절(194154)부터 김기창의 스케치나 「노점」(195355) 같은 작품에서 그려졌던 소재이다. 그러나 김기창의 작품이 강한 먹색의 선묘를 중심으로 판자집, 인물 등을 단순화시키고자 한 반면, 박내현의 「노점」은 색면의 윤곽선은 하얗게 남겨두는 네거티브 방식의 선 처리를 함으로써 선보다는 색면의 은은한 대비를 통해 화면에 긴장과 조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에 대해 당시 이봉상은 “침체해가던 동양화 전반에 자극을 주는 대담한 시도이나 여기에서 이루어진 현대적인 감각과 조형 의식이 서양화에서 이루어진 수법이며 인물의 형태, 건물의 배치, 구조는 동양화의 한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국전을 보고(상) : 국전개막 제작정신의 빈곤」, 『조선일보』, 1956.11.20.)
박내현은 같은 제목으로 남성인물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 작품을 「노점A」, 남성 군상의 시장풍경을 「노점B」(1956,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로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