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목판화. 세로 62.5㎝, 가로 47.5㎝. 개인 소장. 「걸인과 꽃」은 최지원이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조선인으로는 목판화로 처음 입선한 작품이다. 「걸인과 꽃」은 꽃을 든 걸인이 항아리를 이고 지나가는 소녀를 바라보는 장면을 음각과 양각의 교차를 통해 공간을 분할하고 목판 특유의 굵은 선의 강약을 살려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예술로서의 판화 즉 창작판화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9년 조선창작판화협회가 결성되고 1930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창작판화가 출품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창작판화 활동은 재조선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인이 창작판화로 입상한 것은 최지원이 처음이다. 주호회 출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지원은 1930년대 초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퇴하였지만 미술에 타고난 재능을 지녀 독학으로 목판화를 배웠다. 자신의 집에 있는 장농 서랍 뒷면의 나무판까지 모두 판화로 메울 정도로 목판화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최지원이 특히 목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평양부립박물관에 근무하던 일본인 오노 타다아키라(小野忠明)와의 만남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노는 일본 근대기 창작판화의 대표작가라 할 수 있는 무나카타 시코(棟方志功, 1903~1975)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자신도 아마추어 판화가였다.
「걸인과 꽃」은 현재 남아있는 최지원의 유일한 작품으로 오노와 만난 이후 본격적인 목판화 작업을 하면서 제작한 대표작이다. 꽃을 든 걸인이 항아리를 이고 지나가는 소녀를 바라보는 장면을 음각과 양각의 교차를 통해 공간을 분할하고 목판 특유의 굵은 선의 강약을 살려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깡통과 꽃을 들고 있는 걸인은 최지원 자신이며,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소녀는 당시 그가 짝사랑했던 정창고무공장 사장의 딸이다. 유난히 왜소하고 가난했던 최지원은 번번히 여성들에게 거절을 당했는데, 작품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와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사랑의 기억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입선한 이후 최지원은 돈을 벌기 위해 문경으로 갔다가 다시 실연을 당하고 과도한 음주로 요절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노와 광성고등보통학교 동문인 최영림(崔榮林), 황유엽(黃兪燁), 변철환(邊哲煥), 그리고 함께 활동했던 박수근(朴壽根), 장리석(張利錫), 홍건표(洪建杓) 등은 1940년에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시회는 최지원의 호인 주호(珠壺)를 따서 ‘주호전’이라 칭했으며 1944년까지 5년간 지속되었다. 주호회는 1940년대 평양의 대표적 미술인단체로, 최지원의 목판화작업을 이어 주호회 회원이었던 최영림, 박수근, 장리석 등이 서양화와 함께 판화작업을 지속하였다.
판화사에서 「걸인과 꽃」은 삽화나 표지화 같은 인쇄용판화가 아니라 예술로서의 판화 즉 전람회라는 공적 공간에 전시되는 감상의 대상이자 개인의 내적 표현언어로서의 판화 개념을 제시한 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비록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하지 못한 채 요절하였으나 최지원의 판화작업은 이후 주호회 작가들을 통해 한국 현대판화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