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4월 29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공무원이었던 한기제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만주 신경미술학교 졸업 후 만주 미쓰고시백화점에서 윈도우 간판을 그리다가 귀국 후 신태양 극단에 들어가 2년 동안 무대장치, 선전광고 및 프로그램 도안을 비롯, 극장 간판 그리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기량을 닦았다. 최인규 감독의 「집없는 천사」(1941) 미술팀에 참여한 후 일본 도호(東寶)영화사 촬영부에 입사해 촬영을 배웠으며, 일제 말기 최인규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과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
해방 후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 「죄없는 죄인」(1948)을 촬영했다. 그의 안정된 촬영기술은 광복 영화기의 가작으로 꼽히는 일련의 작품들인 「마음의 고향」(1947, 윤용규), 「성벽을 뚫고」(1949, 한형모) 등 해방 이후의 작품에서 더욱 돋보였다. 미술과 촬영을 통해 축적된 그의 영화적 역량은 김영수가 각본을 쓴 최초의 반공영화 「성벽을 뚫고」(1949)의 연출 데뷔를 통해 본격화되었다.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정의의 진격」(1951)을 만든 그의 전후 상업영화 복귀작은 한형모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제작, 감독한 「운명의 손」(1954)이다. 「청춘쌍곡선」, 「자유부인」(1956), 「마인」, 「순애보」(1957) 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스릴러 등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겸비한 작품들을 만든 그는 한국 최초의 키스씬(「운명의 손」), 계급갈등(「청춘 쌍곡선」), 계 바람, 댄스 바람을 비롯한 당대 유행과 근대성이 가져온 다양한 풍조(「자유부인」) 등 당대의 주요 사회적 이슈들을 작품속에 절묘하게 녹여내면서 매끄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정서를 자극했다. 대학교수 부인의 욕망과 일탈을 다룬 영화로 정비석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자유부인」은 개봉 년도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당대 최고의 대중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우아한 카메라워크와 고급스러운 미장센으로 대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풍속도를 보여준 그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1950년대 영화계 상황에서 부족한 스튜디오와 기자재, 필름을 비롯한 원자재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촬영술을 포함해서 편집, 조명 등 영화기술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당대 최고의 기술적 성취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연출과 촬영, 연출과 제작, 연출, 촬영, 편집을 겸한 만능 영화인의 모습을 보였다. 음악 산업을 담은 두 편의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6)와 「엘레지의 여왕」(1967) 연출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는 18편의 연출작과 촬영작 15편을 남기고 1999년 별세했다.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한형모 회고전: 통속/장르의 연금술사’ 개최를 통해 그의 작품들은 다시 한번 관객들과 조우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