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는 해방 이후 「미망인」, 「마인」, 「김약국의 딸들」 등에 출연한 배우이다. 1944년 유치진의 극단 현대극장에 연구생으로 입단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후 낙랑극회(신협의 전신)를 따라 부산에서 만주까지 유랑생활을 했다.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유두연 감독의 「유혹의 강」(1958) 등 많은 영화에서 ‘미망인’을 연기했다. 성적 매력과 과감한 연기를 바탕으로 당대의 톱 배우들과 인기를 겨루었다. 주로 전쟁 과부 역할을 맡아 40대 중년층 관객팬이 많았고,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고 불렸다.
192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의사의 넷째 딸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이민자는 무학여중 2학년 때 우연히 극장 구경을 갔다가 배우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무학여중을 중퇴하고 1944년 유치진의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에 연구생으로 입단하며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16세에 무대에서 인기를 독점하게 되어 바로 그 해에 영화 「태양의 아이들」(1944)에 출연했다. 사실상의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종을 치는 학교급사로 두세 컷에 잠깐 나오는 단역이었기에 첫 주연을 맡은 「여명」(1948, 안종화)을 공식적인 이민자의 데뷔작으로는 꼽는다.
연예계에 진출했던 그 해에 현대극장의 무대에서 같이 연극을 하던 무명배우 김진규와 약혼을 했고, 1945년 결혼식을 올렸다. 해방이 되자 그는 낙랑극회(신협의 전신)를 따라 부산에서 만주까지 유랑생활을 했다. 한국전쟁 후부터 과부연기를 도맡았는데 이에 일조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사생활이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김진규와의 이혼, 애인의 자살 등 일련의 불운한 사건들로 인해 그에게는 늘 팔자가 사납거나 애절한 과부 역이 들어왔다.
총 6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이민자는 이종기 감독의 「이별의 모정」(1969)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1968년 일본에서 재혼, 도쿄에서 클럽 ‘민자’를 운영하기도 했다. 1986년 일본 도쿄대학 병원에서 뇌일혈로 57년의 생을 마감했다.
1940년대 중반에 데뷔하여 전쟁과부 역할을 주로 해 40대 중년층 관객팬이 많았고,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고 불리었다. 이민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이 연출한 「미망인」(1955)에서 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쟁과부의 심리를 불안함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민자는 성적 매력과 과감한 연기를 바탕으로 최은희, 문정숙과 같은 당대의 톱 배우들과 인기를 겨루었다.
「유혹의 강」(1958, 유두연)에서 이성의 힘으로 힘겹게 버티는 과부의 생리를 잘 표현했던 이민자는 연하의 청년 신성일과 정사를 벌이는 「아낌없이 주련다」(1962, 유현목)의 우마담역을 비롯, 과부의 애욕과 갈등을 다룬 「울지 않으련다」(1960, 신경균), 역시 과부로 나온 「자문밖 설마담」(1963, 한상운) 등 많은 영화에서 ‘미망인’을 연기해왔다.
무대와 실제 삶에서 고되지만 폭넓은 경험을 쌓아온 그는 극적인 에너지를 「악야」(1952, 신상옥)에서는 소설가(황남)와 하룻밤을 지내는 미군 댄서 역으로, 「최후의 유혹」(1953, 정창화)에서는 서스펜스를 자극하는 연기를, 김래성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마인」(1957, 한형모)에서는 복수하기 위해 한 남자와 결혼하여 그 가족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팜므 파탈로 표현했다.
30대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40대 중년층 팬을 사로잡았던 이민자는 「김약국의 딸들」(1963, 유현목)로 요염한 눈매의 관능적인 매력 그 너머를 표현했다. 자학과 타락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과부를 주로 맡아왔던 이민자의 변모한 모습은 서늘한 한기마저 느껴지는 비정한 과부로 모진 삶을 살아가는 김약국의 큰 딸 역의 열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찍기 직전 한 대담에서 ‘카르멘’같은 강한 요부 역을 하고 싶다고 말한 이민자의 진정한 매력은 오히려 차가우리 만큼 냉정한 빛을 발하는 에로티시즘과 그 권능에 있는지도 모른다.
1959년 제2회 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 1963년 제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