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에 ‘문예영화’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925년이다. ‘근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문학예술의 반열에 오를만한 좋은 영화’라는 의미는 1930년대 중반 「춘풍」에 대한 문예영화 논란 이후 근대 예술로서 그 자질을 요구하는 경향의 강화로 이어졌다. ‘문예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그것이 구현하는 예술성이 문학과 다르다는 인식보다는 ‘문예영화’라는 이름을 통해 예술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욕망의 표현이었다.
1950년대 이후 문예영화는 오락영화의 대척점에 있는 예술영화나 다른 영화와 구별짓기 위한 홍보를 위해서 그리고 해외 영화제 출품 여부 등에서 중요해졌다. 문학적인 예술성에 기대어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갈망은 1960년대 국가 차원에서 ‘우수영화’를 내세운 당시의 영화정책과 만났다. 점차 영리추구와 대중성 확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국가 차원의 문예영화 지원이 공식화되면서 문예영화는 보상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양산되어 이른바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일반적인 의미의 문예영화는 1958년 경부터 꾸준한 이광수 원작의 영화화와 인기 라디오 드라마 혹은 희곡의 영화화로,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화 붐이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1960~70년대의 영화 근대화 정책과 유착되어 장르화한 것을 말한다.
해외 영화제 출품(「오발탄」)과 한국의 향토적 색채가 깃든 예술영화에 대한 요구(「벙어리 삼룡」, 「갯마을」)는 후기로 갈수록 오리지널 시나리오 영화도 문예영화로 인정받으면서 문학 원작의 여부가 아니라 영화 미학 여부에 있는 것으로 강조점이 옮겨졌다. 1960년대 후반기 문예영화는 다시 서구 모더니즘 계열을 전유하는 영화(「안개」, 「장군의 수염」)와 향토 서정을 추구하는 영화(「물레방아」, 「메밀꽃 필 무렵」, 「감자」, 「봄봄」) 그리고 반공물(「까치소리」, 「카인의 후예」, 「싸리꽃의 신화」)로 구분할 수 있다.
문예영화는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원작에 기대어 작품성 또는 예술성을 추구했던 까닭에 상당한 완성도를 갖춘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고, 해외 출품을 목적으로 제작되어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왔기 때문에 영화미학적 실험의 무대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에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이미 문예영화는 예술영화로서의 미학적 의미는 잃어버리고 외화 수입권을 따기 위한 명분으로서 정책적 의미만 가진다는 한계를 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