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름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한국의 첫 번째 기업형 영화사이다. 미국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를 모델로 하여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 신상옥이 건설했다. 자신의 아내인 최은희를 비롯해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태현실 등을 전속 배우로 채용했다. 용산에 지어진 1천 평 규모의 촬영소에 촬영 스튜디오와 녹음실, 편집실, 영사실, 부설 연기자 양성소 등을 만들었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총 102편을 제작했으며, 신필름 아래에 있던 안양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150편이 넘는다.
‘신필름’은 넓은 의미의 신필름과 공식적 등록사명으로서의 신필름으로 구분된다. 신상옥 감독이 서울영화사라는 공식 영화사명과 제작브랜드로 신상옥프로덕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시기인 신필름 전사(19521959)와 「로맨스 빠빠」에서 「성춘향」의 대성공을 거쳐 1960년대 중후반까지의 전성기(19601965) 그리고 안양촬영소를 인수, 재정압박과 영화산업 전체의 불황, 정치권과의 불화가 겹쳐지면서 하향세로 접어드는 시기(1966~1970)로 구분할 수 있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작품 수는 총 102편이며 신필름 아래에 있던 안양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150편이 넘는다.
신필름은 1961년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성춘향」과 함께 탄생했다. 「성춘향」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은 신상옥은 1961년 영화사 통폐합 조치, 1962년 영화법 제정과 다음해 1차 개정을 거치면서, 엄격한 기준의 통과가 요구되던 당시에 유일하게 단독으로 등록한 ‘영화 왕국’이었다. 안양촬영소 인수(1966)와 함께 홍콩을 비롯한 해외 합작 영화 프로젝트의 추진 등은 메이저 영화기업을 꿈꾸던 신상옥의 거침없는 행보에 새로운 청신호로 보였다. 한때 약 200여 명에게 월급을 주던 영화사로 성장했지만, 장비와 시설을 충분히 활용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만드는 데는 역부족이었고 정부의 지원이 약속대로 이뤄지지 않자 재정적 위기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그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흥행작들의 감소, 잇따른 부도, 양산체제의 가속화 등으로 위기를 맞은 신필름은 1970년 안양영화주식회사로 회사 규모를 축소하고, 1973년에 만든 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연명했다. 결국 1975년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키스 장면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말소 명령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때 ‘영화(映畵)의 왕국(王國)’을 천명하며 대단한 위용을 과시했던 신필름은 영화의 본질이 사회성과 오락을 겸해야 하는 산업이라고 생각한 신상옥 감독의 창조성과 기술적 감각, 대중적 감각과의 결합의 산물이었다. 신필름은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들, 사극(「폭군연산」, 「이조여인잔혹사」), 문예영화(「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벙어리삼룡」), 코미디 「로맨스 그레이」, 액션영화 「빨간 마후라」를 아우르는 신상옥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가 가능하게 한 터전이었으며 한국 장르 영화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또한 대부분의 영화사가 대명제작을 통해 제작편수를 채워가던 시절인 1970년대 한국 영화산업이 전체적으로 쇠락하기 전 거의 모든 영화를 직접 제작한 메이저의 면모를 가진 회사였다. 이 시기 한국영화산업의 현실과 정권에 길항하던 신필름은 ‘한국영화의 기업화’와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큰 틀 안에서 ‘메이저 기업’을 꿈꾸는 한국영화 산업의 끊임없는 시행착오 과정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