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여 3살부터 12살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자랐다. 본명은 강숙자(姜淑子)이다. 1944년 다시 진주로 돌아온 그는 문학소녀로 10대를 보내고, 극작가를 꿈꾸며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통해 연극에 뜻을 두었다. 극단 신협(新協)과 인연을 맺은 강유정은 프롬프터(prompter)의 역할을 하면서 연극의 전 과정에 참가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협에서 머물면서 무대 허드렛일을 하고 단역을 맡았다. 이 기간 강유정은 이해랑, 유치진, 김동원, 황정순, 김선영 등과 활동하면서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강유정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는 이해랑이었다. 그는 이해랑으로부터 연기와 연출의 기본을 배우게 된다. 강유정은 결혼으로 연극계를 떠나고 이후 영화계에 잠시 몸담았지만 곧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연출의 길을 걷는다. 1966년 여인극장의 창단은 강유정의 본격적인 연출활동의 시작이었다. 연출 데뷔작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이었고, 여인극장의 창단 목표는 ‘사회 명랑화 운동’이었다. 이 목표는 1960년대가 사회적·경제적 고통의 시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시된 표어였다. 1971년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 연극연구소에 초청되어 6개월 간 미국의 극계(劇界)와 대학극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 강유정은 여인극장 전용극장인 에딘버러 소극장의 개관기념으로 「셰익스피어의 여인들」을 공연하고, 같은 해 「트로이 전쟁」과 「고해」를 무대화하면서 서서히 극단 대표와 연출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40여 년 동안 여인극장을 이끌어왔던 그는 2005년 사망하였고, 현재 한국 여성연출가 1호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