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 높이 104㎝, 약사여래 높이 100㎝, 아미타여래 높이 99.5㎝.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삼불상으로, 사바세계의 교주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동방 약사여래와 서방 아미타여래를 봉안한 석가여래삼불좌상이다. 이 삼불좌상은 백양사의 말사인 연흥사 대웅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제작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667년에 부운(浮雲)스님이 주도하여 대웅전을 중창할 당시 이 불상을 함께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통하고 귀여운 동안(童顔)의 상호와 함께 얕고 간결한 선묘, 무릎 앞으로 늘어진 옷주름 등의 양식적 특징은 희장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하여 제작한 진안 금당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50년)이나 진도 쌍계사 목조지장보살상(1666년)과 흡사하여 이 불상이 희장과 같은 유파의 조각승들에 의해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연흥사에서와 같이 신앙의 성격을 달리하는 세 구의 불상을 한 전각 내에 봉안하는 법식은 임진왜란과 이후 재건 불사 과정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연흥사에 봉안된 삼불상은 사바세계의 교주 석가여래를 주불로 하여 좌우에 동방 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와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봉안하여 공간적 삼세불(三世佛) 형식을 띠고 있다.
본존 석가여래좌상은 고색찬연한 팔각 삼단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본존불은 좌 · 우 협시불상에 비해 약간 크고 우람하게 조성하여 존격의 차이를 두었고, 착의형식 또한 협시불상의 이중착의식 통견착의법과 달리 변형의 편단우견으로 차별을 두었다. 착의 형식을 달리하여 삼불을 구성하는 것은 방식은 석가여래 · 약사여래 ·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 형식에서는 보편적인 것이다.
본존 불상의 상체는 건장하지만 무릎은 높고 좁은 편인데, 17세기 중 · 후반기의 미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큼직한 반구형의 머리에는 육계의 윤곽이 잘 드러나 있지 않으며 크고 작은 나발을 촘촘히 부착하였다. 머리의 중앙과 정상에는 반달모양과 원통모양의 계주를 표현하였다. 동그란 얼굴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여운 용모이며 이목구비는 작고 부드럽게 모델링하였다.
변형 편단우견으로 걸친 법의는 신체와 유기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가슴에 수평으로 걸친 군의의 윗단은 다섯 장의 꽃잎모양으로 주름을 잡아 멋을 냈다. 주름은 불의(佛衣)의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표현되는데, 불필요한 주름은 최대한 억제하고 얕고 빳빳한 직선과 호선을 간결하게 구사하여 시원한 맛을 준다. 길상좌로 앉은 무릎은 17세기 전반기 불상에 비해 좁고 높아졌다. 그리고 발목을 타고 내려온 넓은 띠 주름은 마치 주걱모양처럼 표현되다. 이러한 주름 표현은 통통한 동안의 상호와 함께 희장 또는 도우가 수화원으로 참여하여 조성한 부산 범어사 석가여래삼존좌상이나 대구 운흥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1653년, 도우), 진도 쌍계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1666년, 희장), 진안 금당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1675년, 희장) 등과 비교할 수 있다.
좌우협시 불상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댄 좌우 손의 위치를 달리하여 대응시켰고, 착의 형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본존불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다만, 본존불에 비해 볼륨이 약화되었고, 신체도 약간 왜소하게 표현하여 존격의 차이를 주었다.
연흥사 목조삼세여래좌상은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 중 · 후반경에 활약한 희장(熙藏)이나 도우(道祐) 유파에서 제작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친연성이 확인됨에 따라, 이 불상도 17세기 중 ·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삼불상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란 이후 크게 유행한 석가 · 약사 · 아미타여래의 시 · 공간적 삼불 형식을 따르고 있어, 이 시기 삼불 도상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