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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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7일 유엔 제5차 총회의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민주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목적 아래 설치된 기구.
이칭
이칭
UNCURK,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
내용 요약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유엔 총회에서 1950년부터 1973년까지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이다. 위원회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유엔군의 승리를 전망한 미국의 주장에 따라 설치되었지만 사회주의권 대표들의 반대로 인해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 대표 위원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칠레, 네덜란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터키 등 7개국으로 구성되었다. 매년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이 보고서의 총회 토의도 진행했다. 1970년대 7·4 남북공동성명 등 국제정세의 변화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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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0년 10월 7일 유엔 제5차 총회의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민주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목적 아래 설치된 기구.
내용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UNCURK)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7일 제5차 유엔 총회의 결의로 만들어졌으며, 그 성격 면에서 이른바 ‘한국문제’를 담당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및 유엔한국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를 계승한 후속 기구였다.

1950년 9월 유엔한국위원회가 제출한 「한국전쟁의 원인과 성격에 관한 보고서」에 근거해 제5차 유엔총회는 “유엔 주도 하의 선거 실시를 포함해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 조치를 취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에 따라 유엔한국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었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오스트레일리아, 칠레, 네덜란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터키 등 7개국 대표 위원들로 구성되었다.(칠레 1971년 11월 탈퇴, 파키스탄 1973년 2월 탈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설치는 유엔군 측에 의해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된 후 북한군이 퇴각했던 전황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서방의 논의를 주도한 미국 측은 유엔군의 승리를 전망하면서 3·8선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또한 “한반도 전체에 걸쳐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통일된 민주한국정부가 인구비례에 기초한 대의제에 의해 수립되어야 하며, 파괴된 경제를 재건시켜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설치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대표들은 유엔군을 포함한 외국 군대의 철수를 주장하고, “남북한 국회의 대표들로 합동위원회를 구성해 그 관할 하에 한반도 전역의 선거를 한반도 인접국 대표들에 의한 감시 아래 실시해야 한다”면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표결에서 우위를 확보한 서방의 의사가 관철되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사회주의권 대표들의 반대 견해로 인해 전폭적 지지 위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권은 위원회의 공정성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위원회가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국가 대표들로 구성되었고, 미국 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1951년부터 매년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연례보고서는 한국의 통일문제와 안보·정치·경제·사회 등 전반적 정세에 대한 분석 및 평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권고 사항이 곧 유엔 총회 대한(對韓) 결의안의 골격을 이루었다. 보고서 제출은 1970년까지 이루어졌다.

보고서는 사회주의권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해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의 해법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어 국제정세의 지형이 일정하게 변경되었고 이 영향 아래에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해체되었다.

1970년대 국제정세는 다극화와 냉전의 이완, 데탕트 분위기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도 한국문제의 해결에서 유엔의 활동보다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대화와 노력을 더욱 중요시했다.

또한 남한 측의 입장도 더 이상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었다. 유엔에 새롭게 가입한 중공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계속 유엔군 철수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해체, 당사자의 자주적 해결 등을 주장했고, 위원회 보고서의 총회 토의는 1971∼72년 중단되었다.

결국 서방측도 위원회의 해체 방안을 수용해 그 안이 1973년 11월 21일 총회에서 전원일치 합의로 채택되었다. 또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해체에 하나의 명분을 제공했다.

참고문헌

「UN과 국제정치체제: UNCURK에 관한 Case Study」(이광호, 『국제정치논총』15, 1975)
「언커크 해체 건의와 그 업적」(김승만, 『국민회의보』3, 1973)
「UN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사명과 업적」(계광길, 『국회보』, 1967)
「언커크와 4월혁명」(이승헌, 『세계』2, 1960)
집필자
김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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