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1580년(선조 13)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로 그는 관리로서 대내외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었다.
그는 일본 사신과 화의를 도모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군(援軍)을 청해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전쟁 중 혹은 그 직후에 병조판서, 이조판서, 훈련도감당상 등의 핵심 요직을 맡아 전쟁으로 인한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덕형은 1613년(광해군 5)에 익사공신(翼社功臣) 및 형난공신(亨難功臣)에 각각 2등으로 책록되었다. 17세기 전반에는 임진왜란 수습, 반정 성공 등의 명목으로 공신 책봉이 잦았으며 이로 인해 공신 초상화가 매우 많이 제작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이 시기에 제작된 초상화 중 그 주인공이 관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그 그림의 화격(畵格)이 매우 높은 그림들 대부분은 공신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매우 뛰어난 화격을 보이는 「이덕형 초상」은 이덕형이 위의 두 공신호를 받았을 때 공신도감에서 제작된 공신상으로 추정된다.
「이덕형 초상」은 조선 중기의 명신 이덕형의 반신(半身)을 묘사한 초상화이다. 그의 얼굴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에 반해 착용한 옷은 거친 느낌을 주는 필선으로 간략하면서도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이 작품은 초본의 초상화로 추정된다.
「이덕형 초상」에 표현된 검은 색의 낮은 오사모와 짧고 넓은 좌우 뿔의 형태는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공신상들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광해군 대에 제작된 공신상 초본들이 대부분 유지 초본에 그려져 있고 단령 부분에는 청색 혹은 녹색의 안료가 거칠게 채색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초상화는 종이에 그려져 있는 데다 청색 혹은 녹색 안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이 초상화는 1613년 공신상 제작 시에 생산된 초본이 아닌, 후대에 진행된 이모본 제작 과정에서 생산된 초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이덕형 초상」에서 이덕형은 우측을 향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오사모의 세밀한 문양 표현, 가는 눈썹과 헝클어진 수염 표현, 단정하게 다문 입술 표현 등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력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귀는 미완성의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덕형 초상은 매우 빼어난 제작기법을 보여주는 수작의 공신 초상화로 평가될 수 있다. 2019년 4월 10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