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원은 박문수(朴文秀)의 증조부로 상주목사, 강원도관찰사, 이조판서 및 공조판서, 대사헌 등의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 그림 화면 우측 상단에는 “구당 박 선생 상(久堂朴先生像)”의 글이, 화면 좌측 하단에는 “선생이 54세이던 을사년(1665년) 겨울에 서관 화사 조세걸이 그리다[先生五十四世, 乙巳冬, 西關畫師曹世傑寫]”라는 글이, 그리고 화면 좌측 상단에는 박장원이 1671년에 작성한 자찬문이 적혀 있다[“先生自贊曰, 所貌者容, 難寫者心, 焉廋在眸, 可質來今, 祿滿宜退, 被以野服, 用貽子孫, 明我心曲. 昌寧曺允亨謹書”].
이 자찬문의 끝에는 정조(正祖) 대에 활약한 서예가 조윤형(曺允亨)이 그 글씨를 썼음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나머지 두 군데에 적힌 글씨의 서풍이 자찬문의 것과 동일해 상기의 글은 모두 이 초상화가 그려진 지 100여 년 후에 조윤형에 의해 서사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를 제작한 6년 뒤인 1671년에 작성된 이 자찬문은 4자씩 구를 이룬 총 32자로 되어 있는데, 3자씩 구를 이룬 총 24자의 주자의 「사조명」을 염두에 두고 박장원이 작성한 글로 여겨진다.
박장원이 주자의 「사조명」을 읽고 그 감회를 술회한 일, 자신의 초상화를 제작한 일 그리고 화상찬을 지은 일은 비록 15년 동안의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이 일들은 모두 주자가 44세에 초상화를 제작하고 찬문을 쓴 일을 염두에 두고 진행한 행위들로 보인다. 이 사실은 조선시대에 일부 사대부들의 초상화 제작이 주자가 자신의 초상화를 제작해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은 것을 본받은 행위였음을 보여준다.
「박장원 초상」과 함께 전하는 목재함은 짜임이나 경첩의 제작기법으로 보아 이 초상화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박장원 초상」에서 박장원은 회색의 사모(紗帽)와 푸른 색 도포를 입고 ‘h’자 모양의 의자에 앉아 몸을 약간 좌측으로 비틀고 공수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복식 묘사에 쓰인 필선은 각지고 거칠며 또한 다소 굵다. 이러한 필선은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공신상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부드럽고 정제되었으며 굵기가 일정한 필선과 명확히 구분된다.
얼굴 표현에서도 같은 시기에 제작된 공신상과는 달리 음영 표현이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특히 코와 눈 부분에서 그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그 결과 특히 코 부분에서 살필 수 있듯이 박장원의 얼굴은 입체적이지 않고 매우 평면적으로 보인다.
1680년(숙종 6) 이후 조세걸은 보사공신(保社功臣)의 공신상 제작에 참여하는가 하면 1695년 숙종 어진 도사 시에 주관화사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정면상을 그렸으며 중국의 초상화풍을 적극 수용해 능숙하게 음영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기도박물관 소장 「 박세채 초상(관복본 초상)」이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 이만원 초상」은 그가 1680~1690년대에 구사했던 초상화풍을 잘 보여준다. 이로 미루어 「박장원 초상」은 조세걸이 자신만의 고유한 초상화풍을 창출하기 이전, 즉 활동 초기에 제작한 초상화일 것으로 추정된다.
「박장원 초상」은 17세기 말 초상화단을 풍미했던 어진화사 조세걸의 활동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 2019년 1월 3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천안박물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