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를 덮은 고깔의 양측 밑단에 두 가닥씩 끈을 매달아 그 끈을 턱밑에서 묶어 착용하였다.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고깔모자는 바느질된 여러 겹의 자작나무 껍질로 탄성을 지닌 속심을 만든 다음, 직물로 감싼 구조였다. 고깔모자는 차별화된 장식을 더하여야만 위세품인 관으로서 기능을 지닐 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복식기록에 따르면, 상위 계층의 모관은 귀금속 장식[冠飾]을 붙이거나 꽂아 착용자의 위계가 드러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백제·신라의 복식은 위계에 따라 색상이 달랐는데, 고깔모자를 감싸는 비단의 색상에도 역시 차이를 두었다. 이를 조합하면 상위 계층의 모관은 비단의 색상과 귀금속 관식으로 돋보이게 만들었고, 중하위 계층의 모관은 관식 없이 그 등급에 따라 비단의 색상만 다르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기물로 만든 고깔모자는 오늘날까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모관의 존재는 대부분 상위 계층의 위계를 드러내는 데 쓰인 귀금속 관식을 통해 파악된다. 귀금속 관식은 착용자의 위계에 따라 금·금동·은으로 만들었다. 신라에서 최상위 계층의 무덤에는 금제를 비롯한 모든 재질의 관식이 함께 부장되었다. 이에 비해 금동제와 은제 관식을 동시에 부장한 무덤과 은제 관식만을 부장한 무덤도 있다. 이러한 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상위 계층 안에서 위계에 따라 재질이 다른 관식을 착용하였던 점과 위계의 상승에 따라 관식의 재질도 상향되는 경향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금속제 모관에는 그 속에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속심이 들어있는 게 확인된다. 특히 신라의 금제 모관은 속심의 겉에 무늬를 넣은 금판을 덧씌운 것에 불과한데 속심과 결합되어야만 완결된 구조를 지니게 된다. 백제 한성기의 금속제 모관도 신라 것과 다르지 않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머리띠 형태의 관인 ‘대관[帶冠]’만을 관으로 보았고, ‘모관’을 ‘대관’의 부속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에 양산 부부총과 나주 신촌리 9호분의 발굴결과를 오인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문헌기록, 고분벽화, 그리고 도용에 표현된 삼국시대의 관은 ‘모관’ 형태뿐이며, 오히려 ‘대관’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모관’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보편적으로 쓰였음에 반해, ‘대관’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만 한정적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모관’과 ‘대관’은 용도를 달리하는 별개의 관으로 보아야 한다.
‘모관’은 문헌기록에 표현된 관의 형태와 일치하며, 주로 남성의 무덤에서 확인되는 점에서 정치적 권위를 표시하는 일상에서의 실질적인 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백제·신라의 관식은 서로 극명하게 형태가 다른데, 이는 관식이 단위 정치체를 드러내는 의장으로 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에서는 새의 깃털 모양을 꽂았고 백제에서는 꽃 모양을 장식하였다고 문헌기록에 나오는데, 이는 고고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에서는 새와 나비의 날개 모양으로 만든 관식이 확인되며, 모관의 꼭지가 둥글지 않고 직선인 독특한 형태도 확인된다. 가야의 모관은 독창적이라기보다 대체로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며, 투구의 정수리를 꾸미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