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동 일대는 오늘날 대구광역시에 속하지만, 1981년 6월 이전에는 경산 고산면이었다. 경산은 삼국시대 이전에 압독이라 일컬어졌으며, 임당유적 일대가 중심지였다. 임당유적의 서쪽으로 남천 너머에 욱수산 하단에서 금호강까지 펼쳐진 선상지에는 청동기시대부터 경산의 하부 집단 가운데 하나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성동토성을 중심으로 시지취락유적과 다수의 고분군 그리고 공방지를 포괄하는 이곳의 문화유산은 통칭하여 ‘고산지구 유적군’이라 한다. 대구가천동고분은 고산지구 유적군의 서북쪽 끝자락에 있다.
대구가천동고분은 금호강의 남쪽 강변에 맞닿은 구릉 위에 있다. 이곳에서는 고산지구의 핵심인 선상지가 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금호강변의 북쪽 끝자락과 성동토성만 조망할 수 있다. 대구선 철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어 영남문화재연구원이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삭평되는 구릉을 발굴하였다. 조사는 삼국시대 분묘와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공방지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분묘는 석곽묘 204기, 석실묘 7기였으며, 다양한 질그릇과 철기류 그리고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등 3,500여점이 수습되었다. 분묘는 대부분 수혈식 석곽묘였으며, 묘광을 등고선과 나란하게 판 것이 주류이지만 직교되거나 엇비슷한 것도 일부 있다. 단곽식뿐만 아니라 주부곽식도 확인되었다. 주부곽식에는 이혈주부곽과 동혈주부곽이 공존한다.
부장품은 장신구뿐만 아니라 질그릇들도 신라양식 일색이었다. 이 고분군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장품은 16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나뭇가지모양 대관[金銅製樹枝形帶冠]이다. 이 금동관은 신라양식에 속하지만, 물결무늬와 돌대 무늬처럼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난 퇴화단계의 요소를 지녔다. 또한 철탁과 함께 부장되었는데, 이러한 양상은 신라의 중앙에서 대관의 유행이 사라지고 지방에서 오히려 모방 제작하던 게 늘어나는 6세기 중엽이후의 모습이다.
대구가천동고분은 5세기 후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조영되었다. 16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철탁은 신라 마립간기에 중앙에서 확립된 고유한 제의가 불교공인 이후인 신라 중고기에 지방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과정과 양상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