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대구의 중심거점이었던 달성토성과 복합을 이루는 지역의 최상위급 고분군이다. 1923년 발굴될 당시 행정구역이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의 비산동과 내당동이었기에 ‘달서고분군’ 혹은 '비산동내당동고분군(飛山洞內唐洞古墳群)'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분군의 분포범위는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3, 4동, 내당2, 3동, 평리2동에 해당된다. 이 고분군 명칭으로 이미 사라진 행정구역인 달서면(達西面)을 사용하는 게 부적절하며, 여러 행정구역에 걸쳐 분포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고분군을 행정구역을 연명하여 부르는 것 또한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고분군은 달성토성과의 복합성을 우선시하여 '달성고분군(達城古墳群)'이라 한다.
1923년 봄에 택지개발과 새로운 서문시장 부지의 복토를 위해 8기의 고분이 민간개발자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사실은 뒤늦게 파악한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지역 행정기관은 6월 하순에 공사를 중지시켰고, 대구경찰서에서는 피해조사와 매장문화재(현, 매장유산)를 접수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사단은 7월 14일부터 26일까지 1차로 긴급 조사를 하였고, 10월 23일부터 12월 13일까지 2차로 본격 조사를 하였다. 당시 파악된 고총고분이 모두 87기였는데 이 가운데 택지개발 범위에 있던 7기만을 선별적으로 발굴하였고,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후에도 도굴 혹은 훼손으로 1929년 10월과 1930년 5월 그리고 1938년 3월에 추가로 매장문화재를 수습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 고분군에서 발굴 혹은 파괴로 모습을 드러낸 유구는 육안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는 고총고분이었다. 매장주체부는 대부분 횡구식석실이었는데, 부장공간인 부곽이 딸린 경우와 하나의 봉분 아래에 동등한 복수의 매장주체부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석실벽을 커다란 판석으로 축조한 독특한 구조는 횡구식이 아니라 수혈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금동제 대관과 허리띠, 은제 모관과 허리띠, 다양한 무구와 마구, 석실 안을 밝힌 등잔 받침과 횃불받침 등등 최상급 부장품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고분군의 규모와 부장품의 질과 양으로 보아, 대구의 중심고분군임이 분명하다. 특히 당시 지역의 중심거점인 달성토성에 인접한 점에서 신라의 지방인 달구벌의 중심세력이 만든 묘역으로 파악된다.
도시의 확장과 무분별한 택지 개발로 가옥들에 완전히 묻혔던 고분군은 1998년의 경북대학교박물관과 영남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 2008년의 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 2015년의 세종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를 거치며 조금씩 전모가 확인되고 있다. 즉 고총고분들 사이에 지표상에 흔적이 사라진 목곽묘들과 석곽묘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이를 종합하면 고분군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