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상 재질에 의한 분류이다. 은제 대관은 매우 희귀한데 반해, 은제 관식으로 추론되는 은제 모관은 착용자의 지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서 백제와 신라의 복식체계 안에서 그 위치가 분명하며 많이 발굴되었다.
은제 대관은 신라와 가야에서 1점씩만 발굴되었다. 신라에서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굴되었다. 한 장의 은판으로 머리띠와 앞쪽 세움장식을 한꺼번에 만들었고 양측면에 새 깃털 모양의 세움장식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같은 형태의 금동관이 함께 부장되었고 이밖에 더 이상의 은제 대관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귀금속제 대관이 만들어지는 초창기에 극히 한시적으로 제작되었던 듯하다. 가야에서는 합천 옥전M6호분에서 단순하게 머리띠만 있는 협대관(狹帶冠) 형식이 발굴되었으나, 역시 더 이상 추가로 확인된 게 없다.
은제 모관은 대부분 유기질로 만든 관모에 은제 관식을 장착한 형태이므로, 관모가 부식되었더라도 은제 관식을 통해 그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 은제 관모는 신라의 황남대총 남분 출토품이 유일하다.
백제의 은제 모관은 6품 이상의 관료가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였다(銀花飾冠)는 문헌 기록과 중앙과 지방에서 발굴된 은제화형관식(銀製花形冠飾)으로 실체가 확인된다. 한편 왕은 오라관(烏羅冠)에 금꽃을 장식하였는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금제화형관식이 실물 자료이다. 복식체계로서 백제의 은제 모관은 웅진시기에 채택되었을 수 있으며, 이후 사비시기에 본격적으로 상위 관료의 복식으로 정착되었음이 분명하다.
신라의 은제 모관은 대형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는 5세기 1/4분기에 처음 만들었다. 백제와 같이 상위 관등의 표식이었음이 분명하나, 관련 문헌기록이 없다. 다만 중앙과 지방의 상위급 이상의 무덤에 부장되고 흔히 은제 허리띠 장식과 한 벌을 이루므로 복식제도로 엄격히 통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제 관식을 소유한 자는 금동제와 은제를 함께 지녔고, 금동제 관식을 소유한 자는 은제를 지닌 경우도 있다. 은제 관식만 단독으로 소유한 경우가 가장 많다. 이를 통해 신라에서도 지위별로 관식의 재질을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은제 모관에는 은제 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을 주로 장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