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을 지은 김립지는 825년(헌덕왕 17)에 왕자 김흔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귀국 후에 추성군[전라남도 담양군] 태수, 한림랑을 역임하였으며. 창림사무구정탑지를 지었다. 김립지가 찬한 성주사비는 여러 비편으로 남아 있다. 서체는 왕희지체를 집자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주사터에는 최치원이 지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만이 남아 있고, 김립지가 지은 성주사비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성주사터와 그 근처에서 10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조선 중기까지 비가 온전하게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최치원이 지은 비에 김립지찬의 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건립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편에 문성왕대에 활약한 김양이란 인물이 보인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의 활동과 그가 성주사에 머물게 된 배경, 성주사의 운영 성과 등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편에는 최치원이 지은 비에 전하지 않는 내용이 일부 보이고 있으며, 이 기록을 통해 성주사가 본래는 백제 법왕이 창건한 오합사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신라의 삼국통일과정에서 활약했던 대각간 김인문의 명이 새겨져 있다. 이로 볼 때, 성주사는 태종무열왕계인 김인문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성주사 일대가 김인문계의 수봉지역이었다는 사실은 숭암산성주사사적의 글에도 남아 있다.
신라 말 고려 초기에 형성된 선종 9산문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