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비로사나불의 왼쪽 어깨 뒷면에 명문이 구양순체 계통의 해서체 명문으로 양각되어 있다.
전체 8행이고 1행에 최대 10자를 쓴 조상기이다. 불상의 조성연대를 먼저 쓰고, 불상을 조성하기 전에 김수종이 국왕의 허락을 받았음을 적고 있다. 명문 내용은 8행으로 된 불상조성기이다. 헌안왕 2년(858) 7월 17일에 당시 무주장사의 부관으로 있던 김수종이 왕에게 주청하여 왕명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김수종은 경문왕 10년(870)에 서원부 소윤으로 있으면서 보림사 쌍탑을 건립하였다.
불상의 명호는 지권인을 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비로사나불이라 부르고 있지만,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에는 노사나불이라고 하였다. 이 불상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철불 가운데에서 명문이 있는 최초의 예 가운데 하나이며, 규모가 큰 대표적인 불상이다. 명문에 조성 연대를 불멸 이후 1808년이라고 밝혀 놓아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북방설의 불멸기원(기원전 949년)이 이때에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안왕 2년 대중 12년(858)으로부터 1808년을 거꾸로 계산해보면 석가여래 입멸의 해는 기원전 949년이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북방설과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북방설은 법림이 확정한 <주서이기>에 따라 기원전 949년을 불멸기원으로 하였다. 그런데 염거화상탑지나 도피안사비로자나불상명에 보이는 연대는 이것과 다르게 되어 있다.
불상의 조성과 관련된 기록이 경내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에도 있다. 불상의 조성시기가 서로 달라 논란이 되고 있다. 조상기의 불멸연기가 비슷한 시기의 금석문과 다르거나, 조상기의 연대표기에 오자가 있다거나, 비문의 연대표기에 오자가 있다는 등의 여러가지 추측이 제기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불멸연기에 대한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