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 묘지명 ( )

고대사
유물
낙랑(樂浪) 가문 출신의 북위(北魏) 시대의 인물인 왕정(王禎 : 476~514)의 묘지(墓誌).
이칭
이칭
위(魏) 고(故) 항주치중(恒州治中) 진양남(晉陽男) 왕군(王君)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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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낙랑(樂浪) 가문 출신의 북위(北魏) 시대의 인물인 왕정(王禎 : 476~514)의 묘지(墓誌).
개설

왕정의 묘지는 1929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호가장(護駕莊)의 남쪽에서 출토되었으며, 우우임(于右任)에 의하여 수집되어 원앙칠지재(鴛鴦七誌齋)를 거쳐 현재 서안(西安) 비림(碑林)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 탁본은 『원앙칠지재장석(鴛鴦七誌齋藏石)』을 통해 알려져 있다.

내용

왕정의 자(字)는 종경(宗慶)이며, 관적은 낙랑(樂浪) 수성(遂城)이다. 514년 4월 10일에 낙양 영강리(永康里)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해 515년 3월 29일에 천장(遷葬)하였다. 묘지의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며,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밝혀져 있지 않다.

묘지에 기록된 왕정의 세계(世系)는 연나라의 의동삼사 무읍공 파의 6세손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에 제수되고, 얼마 후에 항주(恒州) 치중(治中)으로 옮겼다. 왕정은 522년에 사망한 왕기(王基)의 형이다. 왕도민(王道岷)의 두 딸인 원원평(元願平)의 처 왕씨와 안락왕(安樂王) 3자의 처 한씨(韓氏) 자매와는 출신지, 성씨가 같을 뿐 아니라 6세조부가 왕파로 같은 일족이다.

또한 『북주서(北周書)』에는 북주 문제(文帝)의 어머니 명덕황후(明德皇后)와 그의 오빠 왕맹(王盟)도 선조가 낙랑인이며 6세조부가 동일한 인물로 같은 가문 출신이다. 북위 문성제(文成帝)의 황후 문명황후(文明皇后) 풍씨(馮氏)의 어머니는 낙랑 왕씨로 수성현을 출신지로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과 인척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정의 집안은 대대로 북위 조정에서 관작을 부여받고 관직에 종사하였을 뿐 아니라 북위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력가문이었다.

낙랑 왕씨가 중국으로 이주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313년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리던 낙랑의 왕준(王遵)이 백성 천여 가(家)를 이끌고 선비 모용외(慕容廆 : 284~333년 재위)에게 귀의하게 된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연이 멸망하기 직전인 432년에 북위 태무제(太武帝)는 요서를 친정하여 풍문통의 군대를 격파하고 영구·성주·요동·낙랑·대방·현토 6개 군민 3만여 가를 유주(幽州)로 옮겼다. 이로 인해 낙랑군의 유민들이 대거 북위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아마 왕정의 증조부인 정국도 이무렵에 북위에 귀부하게 된 낙랑인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관적으로 언급된 낙랑 수성은 북위에 교치된 낙랑군의 속현으로 유주 비여현(肥如縣) 동남쪽에 위치한 갈석산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정의 묘지명에서 주목되는 것은 시조전승 기록이다. 묘지에는 ‘은(殷)나라에 세 사람의 어진 신하가 있어,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구주(九疇)를 물었다. 그 족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라고 하여 왕정의 선조 가계 기원을 은나라에서 찾고 있으며 고조선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동생 왕기의 묘지명에서는 ‘그 선조가 은나라로부터 유래하여 주 무왕이 상(商)을 정복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하여 기자의 후손이라 하였다.

낙랑 왕씨가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고조선이 멸망한 후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의 운영과 관련된 이주 한인(漢人)과 토착세력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이 오랫동안 ‘낙랑유민’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명분면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중원왕조의 정치적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낙랑 왕씨의 가계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요서로 옮긴 낙랑군의 이후 행적과 그 유민들의 향방에 대해서도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중국의 <원앙칠지재> 소장 고한인 묘지 연구」(민경삼, 『중국학논총』 21, 2006)
「4세기 이후의 낙랑교군과 낙랑유민」(이성규,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국과 한국』, 서해문집, 2005)
「중국 출토 한국고대 유민자료 몇 가지」(윤용구, 『한국고대사연구』 32, 2003)
「낙랑유민의 묘지 이례」(윤용구, 『인하사학』 3, 1995)
「금석문 자료소개 - 왕기 묘지」(서영대, 『한국고대사연구회 회보』 30, 1993)
「왕정묘지명」(임기환,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난하 하류의 조선 -중국 동방주군의 치폐와 관련하여-」(천관우, 『사총』 21·22,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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