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산문(桐裡山門)
논란이 있지만, 당시 태안사는 3천 석에 가까운 곡식과 500결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원전이 전남의 보성, 승주, 나주, 영광과 경남의 진주, 합천에 이르기까지 8곳에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태안사의 경제 규모와 함께 동리산문이 독자적인 산문으로 자리 잡았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한 계열이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도선의 문하에는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8~948)가 대표적인 선승으로 활약하였다. 경보는 892년(진성여왕 6)에 당에 들어가 소산 광인(疎山匡仁)의 법을 잇고, 921년(경명왕 5)에 견훤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전주 남복선원에 머물렀다. 이후 경보는 옥룡사로 옮겼으며, 고려 태조, 혜종,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