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시(咸興市)
이때 함흥 지방을 중요시하여 영흥에서 관찰사영을 옮긴 것은 8년 전에 태조가 죽고 태종의 통치 체제가 확고해짐에 따라 출생지의 격을 높이기 위한 조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현재 호수 3,538호, 인구 8,913인, 간전(墾田) 2만7774결(수전은 150결)이고, 군사 체제는 소윤(少尹)이 함흥도중익병마단련부사(咸興道中翼兵馬團練副使)를 겸하며 군정(軍丁)은 익속군(翼屬軍) 660인, 강군(剛軍) 150인, 수성군 76인이 있었다. 1467년(세조 13) 5월 길주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 삽시간에 길주 이북을 점령하였고, 함흥에서도 같은 달에 이중화(李仲和)가 유향소를 동원하여 관찰사 신면(申㴐)을 죽이고 반란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같은 해 8월에 구성군 준(龜城君浚)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