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실(伯實), 호는 취죽(醉竹). 우의정 강희맹(姜希孟)의 4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태수(姜台壽)이고, 아버지는 사용(司勇) 강복(姜復)이며, 어머니는 김안국(金安國)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진사가 되었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년 뒤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처음 예문관에 뽑혔다가 곧 홍문관정자로 옮겼으며, 1555년에는 김귀영(金貴榮) · 이량(李樑) 등과 함께 사가독서한 뒤 이듬해 부수찬에 올랐다.
이어 문학 · 지평 · 부교리 · 교리 · 부응교 · 장령 · 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563년 검상 · 사인을 거쳐 군자감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생활은 당시 권세를 잡고 전횡하던 이량을 추종한 결과였으며, 사신(史臣)들은 그를 이량의 무리였기 때문에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1563년 이량이 축출당하자 계속적인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으며, 1574년 조정에서 파직된 그의 재서용 논의가 시작되어 대간의 반대가 있기도 했지만, 과거급제자인 점이 고려되어 다시 관직에 나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장단도호부사를 지냈다.
행신(幸臣: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이량과의 친분으로 많은 비난과 역경을 겪었다. 사가독서 때 사온(賜醞: 궁중에서 하사된 술)에 취해 있다 해질녘에 깨어나 겨우 지어 바친 시로 명종으로부터 찬탄과 함께 말 한필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