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 · 한계(閑溪) · 청월헌(聽月軒)이며, 1603년(선조 36)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고, 아버지는 죽창(竹窓) 강주(姜籒)이며, 어머니는 김응서(金應瑞)의 딸 안동김씨이다. 부인은 동지중추(同知中樞) 김광수(金光燧)의 딸 안동김씨와 찰방(察訪) 황담(黃湛)의 딸 창원황씨가 있다.
창원황씨와의 사이에서 승지 강선(姜銑) · 이조참의 강현(姜鋧) 형제가 있다. 사위로 좌랑 안후상(安後相) · 판서 민취도(閔就道) · 참판 남익중(南益熏) · 좌랑 남수규(南壽奎)를 두었다. 강백년의 아들 강현과 손자 강세황(姜世晃)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불렸다.
강백년은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간 후부터 1680년(숙종 6)까지 55년 동안 내외직을 두로 역임하였다. 내직으로 정언, 사간, 장령, 수찬 외에도 대사간, 도승지, 대사성, 대사헌, 의정부 참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내냈다. 외직으로는 강릉 · 청풍 · 여주 · 종성의 수령과 충청도 · 강원도 · 황해도 · 경기도 감사를 역임했다.
지방관으로 재직 시 청백하고 애민(愛民)하는 정치를 실시하고, 대동법(大同法) 실시에 일조하였다. 또한 당대 관각문학(館閣文學)을 대표하는 문한(文翰)으로서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대제학의 물망에도 올랐다.
1646년(인조 24) 강빈옥사(姜嬪獄事)의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삭직을 당하고, 1648년(인조 26) 대사간에 있으면서 다시 강빈(姜嬪)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1660년(현종 1)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오고, 1673년(현종 14) 참찬이 되어 기로소에 들었다. 1674년(현종 15) 예조판서 · 대사헌을 역임한 후 우참찬 겸 예문관 제학으로서 현종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1680년(숙종 6) 좌참찬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강백년은 특별한 사승(師承) 없이 아버지 강주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사서(四書)와 정주학(程朱學)에 심혈을 기울여 스스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그는 일찍이 부친의 뇌물 수수 사건을 겪은 후부터 인간 삶의 본원성이자 절대적 이념으로서의 ‘경(敬)’을 통한 무욕(無慾)이 사사로운 인욕(人慾)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도덕적 · 윤리적 가치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또한 ‘공구수성(恐懼修省)’을 통해 청렴(淸廉) 정신을 현실 세계에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대학』의 수제치평(修齊治平)에 뜻을 두고, 『중용』은 자신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다.
강백년의 ‘무욕’적 삶의 지향은 『 한계만록(閑溪謾錄)』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은 고금(古今)의 가언(嘉言)과 선정(善政)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대학』의 팔조목을 모방해서 편집한 것이다. 강백년은 스스로 “내가 평생 큰 잘못이 없었던 것은 모두 이 책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강백년은 문장과 시에 모두 뛰어나 소북팔문장(小北八文章)의 일인이자, 관각문학을 대표하는 문한으로도 인정되었다. 그는 기존의 시화서(詩話書)에서 주목받았던 당풍(唐風)의 시뿐만 아니라 송풍(宋風)의 시에도 뛰어났다. 특히 평범한 가운데 굳건한 기상과 함께 세속과 단절된 풍취를 묘사한 관물론적인 당풍의 시로 인정을 받았다. 1641년 월과에서 장원한 「차두공부구일남전최씨장(次杜工部九日藍田崔氏莊)」은 강백년의 두시(杜詩) 이해와 당풍의 창작 능력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송풍의 시를 통해 끊임없는 자아 성찰과 수양으로 얻은 도학적 성취를 읊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문(詩文)이 산실(散失)되었고, 남은 것을 엮어서 1690년대에 아들 강선, 강현 형제와 임상원(任相元)이 주관하여 『설봉집(雪峯集)』을 간행하였다.
강백년은 1690년(숙종 16)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95년(숙종 21)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충청도 온양(현 아산시)의 정퇴서원(靜退書院), 황해도 수안군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충청북도 청주시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배향되었다. 2002년 충청남도 공주시에 후손들이 문정사(文貞祠)를 건립하였다. 묘비는 대사헌 · 홍문관제학 임상원이 지었다. 신도비는 1705년(숙종 31)에 세웠는데, 비문은 임상원이 짓고 조상우(趙相愚)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아들 강선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