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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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조선 후기~대한제국기에 국왕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던 내시.
이칭
주(周)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8년
사망 연도
1933년
본관
진주
주요 경력
내시
관련 사건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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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강석호는 조선 후기~대한제국기에 국왕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던 내시이다. 1875년 벼슬길에 오른 이후 갑오개혁 이후에 민영환과 함께 친미파로 활동하는 등 복잡다단하였던 이 시기 정치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고 내시부가 해체되면서 그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대한제국기에 국왕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던 내시.
인적사항

강석호(姜錫鎬, 1858~1933)는 1858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주(周), 향은 진주로 17세인 1875년에 관직에 올랐다. 1896년에 봉시겸승전색(奉侍兼承傳色)에 임명되고, 홍릉시릉관(洪陵侍陵官), 경효전상선(景孝殿尙膳), 영왕궁차지(英王宮次知), 의효전상선(懿孝殿尙膳) 등을 역임하였다. 1933년 11월 23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강석호가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 계기는 아관파천 당시 이범진과 함께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부터이다. 그는 이 공으로 내시 벼슬의 하나인 시종원 봉시가 되었고,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에 민영환과 함께 친미파로 활동하였으며, 고종의 측근으로 박영효유길준의 암살 계획 등을 단행하는 등 고종의 지근거리에서 보좌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고종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는 과정에서 내시부가 해체되자, 강석호 또한 영향력을 잃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실록(高宗實錄)』
『매천야록(梅泉野錄)』
『한국통사(韓國痛史)』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논문

장희흥, 「대한제국기 내시 강석호의 활동」(『사학연구』 89, 한국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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