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터이다. 1959년 1차 발굴조사에서 쌍탑식 가람배치로 밝혀졌고, 1979년과 1980년의 2차 발굴조사에서 초창(初創) 이후 2번에 걸쳐 중건(重建)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지정(至正) 11년(1351) 명문(銘文)이 있는 청동반자(靑銅飯子),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2구, 기와류∙벽돌류∙토기류∙자기류 등이 4,268점이 출토되었다.
한편, 1961년 서탑 해체∙보수 당시, 제3층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서탑에서 발견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천왕상이 그려진 외함과 내함, 사리기, 사리병 등을 갖춘 사리장엄구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경주 감은사지는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쌍탑(雙塔), 금당(金堂), 강당(講堂) 순으로 배열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雙塔式伽藍)이다. 남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이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중문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架構式)의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면의 각 칸마다 2짝 출입문을 달았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의 전후면에 모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은 정연하게 쌓아올린 2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의 사방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기단은 턱이 있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면석(面石)을 세우고 그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이다. 금당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 유구(石造遺構)가 조사되었다.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부합된다.
금당 북쪽의 강당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수직으로 쌓은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으나 후대에는 서쪽 3칸이 축소되어 정면 5칸, 측면 4칸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좌우에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는 회랑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회랑 중에서, 남회랑은 중문 동 · 서쪽으로 각각 10칸씩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남단에서 12번째 칸에 7칸의 익랑이 금당 좌우로 연결된다. 이 회랑들도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으로 꾸며졌다.
금당 앞 좌우에 남아 있는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들은 2중기단 밖으로 탑구(塔區)가 돌려져 있는 3중기단의 형식의 삼층석탑이다. 각 부의 구성이 백제의 석탑처럼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을 5단의 층급으로 표현한 것 등이 목조가구를 모방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건립연대가 확실하여 현존하는 한국 석탑, 특히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곳곳의 석재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중심영역이 정방형으로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잇는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이며 금당과 양측 동서 회랑 사이로 익랑을 두어, 이후 건립된 사천왕사(四天王寺) 배치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는 황룡사(皇龍寺) · 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사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