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 초상 및 문중유물』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제주 고씨 문중에 소장되어온 20종 215점의 문서 및 유물 일괄로 1982년 11월 9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물은 조선 중기 무신인 고희의 영정과 유품을 비롯해서 조부 고세호로부터 12대손 고정상에 이르기까지 13대 동안 작성된 것들로, 세거지였던 부안 문중에 보존되어 왔다.이 유물들은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 아래에 있는 청호리 제주 고씨 문중에서 보관되고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을 책봉받은 영성군(瀛城君) 고희(高曦, 1560~1615)를 위주로 해서, 아버지 제원군(濟原君) 고사렴(高士濂)과 할아버지 건공장군(建功將軍) 고세호(高世豪)로부터 그의 12대손 고정상(高定相)에 이르기까지 13대 372년(1522∼1894) 동안 작성된 각종 고문서와 유물 일괄이다.
문중 유물 가운데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영정 · 교지 · 관용 물품(官用物品) 등 36점의 주인공은 고희이다. 그는 문충공(文忠公) 고경(高慶)의 10세손으로 1560년(명종 15) 부안 봉덕리에서 태어났다. 25세 때에 무과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파천하는 선조를 호종해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부친 고사렴은 봉군(封君) 및 가작(加爵)되었고, 할아버지 고세호도 증직되어 추존되었다.
아들 고홍건(高弘建) 역시 무과에 급제해 군문에 재직 중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해 충성을 다한 공훈으로 호성원종공신 3등이 되었고, 영원군(瀛原君)에 봉작되었다.
고홍건의 아들 고두황(高斗煌) 역시 무과에 급제한 이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로 영해군(瀛海君)에 봉작되는 등한 집안 4대에 걸쳐 봉군되었는데 이는 매우 보기 드문 경우였다. 이와 같이 이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무반으로서 혁혁한 공훈을 세워 대문호를 이룸에 따라 공신녹권(功臣錄券)과 공신회맹록(功臣會盟錄)를 비롯하여 교지(敎旨), 교서(敎書), 하첩(下帖), 완문(完文), 소지(所志) 등 각종 문적 및 유물 등이 현존하게 되었다.
지정된 유물을 연대별로 보면, 중종 때 고세호로부터 4대 인조 때까지의 유물이 76점이며, 인조∼숙종 때 고세호의 현손 고두황으로부터 고종 때 고세호의 12대손 고정상에 이르는 유물이 139점이다.
이 중 중요한 유물을 보면, 영정은 전부 고희(古稀)의 모습으로 전신상 1폭과 안면상 2폭이 있다. 교지는 중종 때 고세호를 비롯해 정조 때 고영기(高永基)에게 내려진 것이다. 유품은 상아빗 · 패옥(佩玉) · 관자(貫子) · 관복띠 · 관복띠함 및 관복요대(官服腰帶) 장식품 등 고희의 것과 고두황의 호패 등이다.
이 집안에서 소장한 공신녹권를 비롯한 각종 고문서 및 유물 등은 역대의 병란을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관되었다는 점에서 귀중한 국가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고희의 6대손 고진호(高鎭皥)의 호구단자는 37세부터 79세까지 매 3년마다 작성된 것이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시대 가족 및 신분 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