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 4책. 필사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필사연도를 알 수 없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2에 시 422수, 권3∼6에 소(疏)·차(箚) 45편, 권7에 응제문(應製文) 4편, 권8에 전(箋) 2편, 권9에 계(啓) 3편, 권10에 공사(供辭) 2편, 권11에 시장(諡狀) 3편, 권12에 묘문 7편, 권13에 제문 12편, 권14에 서(書) 22편, 권15에 서(序) 6편, 권16에 기 3편, 권17에 논 2편, 권18에 뇌(誄) 2편, 권19에 잡저 1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편수의 다과에 구애되지 않고 문류(文類)에 따라서 분권(分卷)한 것이 편차상의 특색이다.
시에는 우음(偶吟)과 관경(觀景)·영물(詠物)의 만흥(漫興) 내지 감회의 내용을 담은 것이 많으며, 시인으로서 소질이 풍부하여 고체(古體)·근체(近體)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소·차는 분량이나 내용의 측면에서 문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사부교리겸진소회소(辭副校理兼陳所懷疏)」는 영조에게 ‘파붕당(破朋黨)’·‘절재용(節財用)’·‘엄사닐(嚴私昵: 내시의 폐를 엄금할 것)’ 등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다른 소·차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조에게 “신하를 예(禮)로써 대하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강직한 성격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진망(眞望)을 위해 대신 지은 「진민폐소(陳民弊疏)」는 7,200여 자의 장문으로 영남·호남에서 여러 해 계속되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민생이 피폐된 참상을 보고하고, 여러 가지 시정책을 건의하고 있다.
권9의 「호남어사서계별단(湖南御史書啓別單)」도 8,000여 자의 장문으로 된 현지보고서로서, 호남지방의 참혹한 실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전쟁이 끝난 지 근 100년 이상이 되었던 당시에도 아직 전쟁의 참화가 가시지 않고 전혀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민생은 도탄에 빠져 곳곳에서 밤마다 도적질이 자행되고 있다고 현지실정을 밝힌다. 이어서 궁가(宮家)의 어장(漁場)과 선세(船稅), 동전(銅錢)의 폐단, 대동법(大同法) 시행 후의 문제점, 양전(量田)의 문제점,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의 복정(卜定)과 무판(貿販)의 문제점 등 당시의 실정과 민막(民瘼)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계 3편과 권10의 공사 2편은 모두 이두가 행간에 쌍행으로 곁들여져 쓰여 있는데, 이 방면의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한편, 저자는 붕당의 피해를 혐오하고 중도적 입장을 취해 당시 노론·소론의 극렬분자들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한 사람으로, 소·차와 계문 등 그의 사환(仕宦)과 관련된 기록들이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밖에 「인대신차사이조좌랑소(因大臣箚辭吏曹佐郎疏)」·「사강화유수소(辭江華留守疏)」·「논임징하소(論任徵夏疏)」·「양역변통소(良役變通疏)」 등 기타의 소·차에서도 18세기 초 국내의 정치적·사회적 문제점들을 많이 거론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