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구미시(옛 선산군) 고아면 봉한2동 뒷산에서 사방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 1구(국보, 1976-1 지정), 금동보살입상 1구(국보, 1976-2 지정)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 세 구의 불상은 원래부터 삼존 형식을 이루면서 같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연화대좌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로 서 있다. 조각 수법도 매우 섬세하고 우수하며, 몸의 균형도 잘 맞고, 비교적 날씬한 형태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그 정면에 화불(化佛)이 새겨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미소를 띠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작은 연꽃봉오리를 가볍게 받쳤다. 왼손은 내려서 지물 또는 천의자락을 쥐었던 듯하나, 결실로 인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목에는 목걸이를 걸고, 어깨에서 구슬 목걸이[瓔珞] 장식이 ‘X’자 모양으로 늘어졌다. 배 부분의 둥근 꽃무늬[花文樣] 장식으로 교차 연결되다가 무릎 옆으로 늘어진다.
몸에는 얇은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다. 천의는 오른팔에 한 번 걸쳐지고 무릎 앞에 둥글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다시 왼팔 위로 걸쳐져 그 끝을 대좌 위로 내려뜨렸다. 그러나 늘어진 부분의 천의는 파손되어 있다. 군의(裙衣)는 발밑까지 드리워지고, 음각선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대좌는 칠각형이며, 그 위에 두 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뒷면에도 앞면처럼 구슬 목걸이 장식이 교차되었고 옷주름도 잘 표현되었으며, 목 아랫부분에는 광배를 결합하기 위한 네모진 꼭지가 남아 있다.
이와 같은 표현 양식상의 특색에서 이 불상은 중국 수나라 때의 금동보살상 양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작 연대는 대략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또한 출토지가 신라 영토였던 경상북도 선산(현 구미시)이라는 점에서, 신라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불상과 양식이 비슷한 불상으로는 부여 규암면 출토의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 2구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불상을 들 수 있다. 보주를 들고 서 있는 자세나 구슬 목걸이 장식 등 형식 면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은 계통이다. 그러나 선산의 보살상이 더 발전된 양식을 보여주며, 기법 면에서도 훨씬 더 정교하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의 신라 조각에서는 보기 드물게 우수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어, 신라 말기의 조각 중 대표적이고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