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행주(幸州). 초명은 자정(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증조부는 응교(應敎) 준(遵)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대항(大恒)이고, 아버지는 응세(應世)이며, 어머니는 우찬성 임백령(林百齡)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2년 예문관봉교겸설서(藝文館奉敎兼說書), 병조·이조좌랑을 거쳐, 정언·집의·성균관직강·홍문관부교리·보덕(輔德)·사간·사인(舍人)·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관찰사, 이듬해에 부제학·대사헌이 되었다. 1601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신원하고,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 : 광해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맹자≫를 강의하였다. 이어 병조·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어 사임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 때 선조가 세자를 폐하고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한 정온(鄭蘊)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해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옳지못하다고 간언하다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길주(吉州)로 이배되었으며, 풀려나와 강릉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모의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해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 일족도 몰살당하였다. 1627년이원익(李元翼)·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