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 ()

근대사
인물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칭
원표(元表)
청암(淸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1년
사망 연도
1933년
본관
경주(慶州)
출생지
충청남도 회덕군(지금의 대전광역시)
주요 경력
민종식 의진 선봉장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77)
관련 사건
정미의병
내용 요약

김동신은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6년부터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전국적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북도 정읍에서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순창, 남원, 용담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의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
인적사항

김동신(金東臣, 1871~1933)은 충청남도 회덕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菴)이다.

주요 활동

1906년 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봉기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주1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갔다.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김동신은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산에서 기우만(奇宇萬) ·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주2하고 주3를 모아갔다.

이후 9월경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고, 남원 모래사장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여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 9월 중순경 용담 내원사(內源寺)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으나, 통수권과 전략 등의 문제로 공격해 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자 곧 해진하였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용담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본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처럼 전라도 ·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인 충청남도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1908년 6월에 체포되었다.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주4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기려수필(騎驢隨筆)』

단행본

『독립운동사자료집 1권』(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국가보훈처)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일조각, 2004)

논문

홍영기, 「舊韓末 金東臣 義兵에 대한 一考察」(『한국학보』 56, 일지사, 1989)
최근무, 「義兵大將 金東臣의 思想에 관한 硏究」(『논문집』 제19집, 전주교육대학, 1983)

기타 자료

『대전분서의 체포 및 청취서』(1908. 6)
주석
주1

군사들이 머물러 있음. 또는 군사들을 머물러 있게 함.    우리말샘

주2

의병 따위를 불러 모음.    우리말샘

주3

전쟁에 쓰는 도구나 기구.    우리말샘

주4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헌주(연세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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