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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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고성군태수, 무주도독 등을 역임한 귀족. 대신.
이칭
위흔(魏昕)
이칭
김위흔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808년
사망 연도
857년 8월 13일
주요 관직
고성군태수|무주도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양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귀족으로 고성군태수, 무주도독 등을 역임한 대신이다. 808년에 태어나 857년에 사망했다. 태종무열왕의 9대손으로 김주원의 증손이다. 대대로 시중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차지한 집안이었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하였다. 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청해진의 장보고와 함께 모의하여 균정의 아들 우징을 추대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 때에 시중과 병부령으로 중용되었다. 사후에 서발한(舒發翰)으로 추증되었고, 태종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고성군태수, 무주도독 등을 역임한 귀족. 대신.
개설

자는 위흔(魏昕). 태종무열왕의 9대 손이며, 증조부는 이찬 김주원(金周元), 할아버지는 소판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김정여(金貞茹)이다. 그의 집안은 780년(혜공왕 16)에 태종무열왕계의 왕통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 건재해, 대대로 시중(侍中)을 역임하는 등 정계에서 요직을 차지하였다.

특히 822년(헌덕왕 14)에 그의 할아버지와 형제 항렬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그 일당이 모두 살해되었음에도 종기의 집안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가 되고 이어 중원소경(中原小京) 대윤(大尹),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활동사항

836년 12월 흥덕왕이 죽은 뒤 균정(均貞)제륭(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그는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족병(族兵)으로써 숙위했으나 제륭 일파의 기습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이 때 그는 제륭의 부하인 배훤백(裵萱伯)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은 채, 포위망을 뚫고 경주 북쪽인 한기(漢岐) 방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838년(희강왕 3) 1월에 상대등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2월에 병사를 모집해 청해진(淸海鎭)으로 떠났다. 이때 청해진에는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이 청해진 대사(大使)장보고(張保皐)와 더불어 복수를 꾀하고 있었는데, 그는 우징 ·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타도하기로 모의하고 그 해 3월 강병 5,000명으로 무주를 습격, 함락시키고 다시 남원으로 진출해 정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피로한 기색을 보이자 일단 청해진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서 장보고 휘하의 강병 5,000명을 이끌고 경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그의 군대는 무주 철야현(鐵冶縣)에서 김민주(金敏周) 휘하 정부군의 저항을 받았으나, 기병 3,000명으로써 적진에 돌격해 이를 섬멸하였다.

이어 839년 1월에는 대구(大丘)로 진격해 민애왕이 거느리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왕도 죽였다. 이로써 경주의 왕성(王城)을 수복한 그는 4월에 우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배훤백을 비롯해 민애왕 정권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관대하게 용서해 인심을 얻었다.

7월 신무왕이 재위 3개월 만에 죽자 아들 문성왕이 즉위했는데, 그는 반정공로(反正功勞)로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받았다. 그 뒤 이찬에 오르고, 847년(문성왕 9) 8월 시중이 되어 이듬해까지 재임하였다. 시중 퇴직 뒤에도 병부령(兵部令)으로서 문성왕에 중용되었다.

한편, 그는 당나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받기도 하였다. 857년 8월 13일에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문성왕은 서발한(舒發翰)으로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염장(殮葬)을 모두 김유신(金庾信)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그 해 12월 8일 태종무열왕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하대 균정계의 왕위계승과 김양」(윤병희, 『역사학보』96, 1982)
「신라하대의 왕위계승과 정치과정」(이기동, 『역사학보』85, 1980)
「신라 원성왕계의 왕위교체」(오성, 『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9)
「신라하대의 집사성」(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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