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택우(宅于), 호는 매음(梅陰). 할아버지는 나세겸(羅世謙)이며, 아버지는 나용(羅瑢)이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46년(인조 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학(太學)의 선비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혼자 남아, 성묘(聖廟)를 지키는 정신국(鄭信國)·박산미(朴潸美) 등을 불러모아 큰 자루를 만들게 하고, 그 속에 위판(位板)·제기(祭器) 등을 모두 넣고, 또한 성현들의 위판도 함께 받들어 도성을 빠져나왔다.
남한산성에 이르자, 인조는 갸륵한 행위를 가상히 여겨 미포(米布)를 하사하였고, 위판은 개원사(開元寺)에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1637년 환도하자 다시 위판을 받들고 귀환하였다.
1653년(효종 4) 정언이 되었고, 1663년(현종 4) 장령에 이어 수찬·교리·보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부교리가 되었으며, 집의·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영조 50) 성묘를 지켰다는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사계서원(泗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