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학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병조참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도(師道)
창주(滄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58년(효종 9)
사망 연도
1731년(영조 7)
본관
수성(壽城)
출생지
영주(榮州)
주요 관직
병조참지
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참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사도(師道), 호는 창주(滄洲). 영주 출신. 할아버지는 사간 나이준(羅以俊)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나수종(羅壽宗)이며, 어머니는 박창징(朴昌澂)의 딸이다. 통덕랑(通德郎) 나수성(羅壽星)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3년(숙종 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88년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역임하고, 1690년 지평·정언·면천군수(沔川郡守)·울산부사·예빈시정·인동부사·판교(判校)·서천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老論)의 일파로 시론(時論)을 진언하여 민생의 어려움과 군비의 소홀함 등을 지적하였고, 1725년(영조 1) 사성·필선·보덕·사간을 거쳐 승지·병조참지·우부승지에 이르러 영조가 탕평책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려고 하였다.

즉, 영조는 탕평책을 위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까지도 거론하지 못하게 하자, 사색을 논하는 당론이 아닐 경우인 역적을 토척한다든가 의리를 밝힌다든가 하는 일은 권장하여야 하며, 역적 김일경(金一鏡) 일파의 예를 들어 모역자들은 엄벌에 처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1727년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자 나이 칠십을 이유로 극구 사양하다가 좌승지·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때 영남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관(北關)사람들이 나학천을 난적(亂賊)으로 몰아 파직시키자,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난이 평정된 뒤 1729년 다시 병조참지가 되었다.

이어 비록 영남사람이기는 하나 김일경과는 다르다는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성품이 강직하고 자신을 지키는 태도가 확고하여, 당시의 당론에 휩쓸리지 않고 독보적인 존재로 정명의리론(正明義理論)을 주장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회헌집(悔軒集)』
집필자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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