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