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초명은 노숭(盧崇),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할아버지는 대호군 노단(盧亶)이고, 아버지는 감찰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이며, 어머니는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 이천로(李天老)의 딸이다.
1357년(공민왕 6)에 진사가 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지신사(知申事)·대사헌·지밀직(知密直)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우왕 때는 왕에게 놀기 좋아하는 것을 여러 차례 간언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1389년(공양왕 1)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용안(龍安: 지금의 익산)과 영산(榮山: 지금의 나주)에 각각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세웠다. 그리고 성을 쌓아 조운을 편리하게 하고, 왜구로부터의 피해를 막았다. 또한 조세를 3년 동안 면제시켜주도록 조정에 건의했으며, 의창(義倉)이 없는 주군(州郡)에 이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정진개국원종공신녹권(鄭津開國原從功臣錄券)』에 의하면, 조선 개국 후 한양윤(漢陽尹)으로서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1395년(태조 4) 개성유후(開城留後)를 거쳐 1397년에는 경기좌도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경기 땅에 고관들의 별장이 많았는데, 차역(差役)을 고르게 하고 청탁을 하지 않는 청렴함을 보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으나 노모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다음 해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었고, 그 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14년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에 이르렀다. 죽을 때 아들들에게 불사(佛事)를 쓰지 말도록 유언했으며,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상주의 옥연사(玉淵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경평(敬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