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호(閔龍鎬, 1869~1922)는 경상남도 산청군 출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69년 10월 29일 민치겸과 연안이씨 사이의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25세경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으로 옮겨 민치우의 양자가 되었다. 자는 문현(文賢), 호는 복재(復齊), 이명(異名)은 민진호(閔晉鎬)이다.
민용호는 경기도 여주의 청년 문사(文士)로 을미사변 이후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후에 강원도 강릉을 중심으로 한 관동창의소 의병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경기도 지역에서 여러 의병진과의 합동 작전을 피하고, 산악지대인 관동 방면으로 나가서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민용호가 여주에서 거느리고 떠났던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도중 강원도 원주에 들러서 상당수의 병력을 충원한 후 평창 · 진부를 거쳐 대관령을 넘어서 1896년 1월에 강릉으로 들어갔다.
안승우가 1896년 1월에 민용호에게 연합의진을 제의하였으나 민용호는 거절 후 예정대로 강릉으로 들어가서 당시 강릉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영동 방면의 의병들과 세력을 합하였다. 산군(山郡) 지방의 포수들을 모집하여 영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이병채 · 최중봉 등 의병장들과 함께 부서를 정하며 포고문(布告文)을 각 지방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강릉에 들어와서 관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한 민용호는 관동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오랫동안 사냥을 직업으로 삼아 오던 포수들을 모집하여 자체의 실력을 충분히 한 다음 관북 방면으로 진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후 3월 개항장이며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함경남도 원산(지금의 북한 강원도 원산시)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원산 공격에 실패한 그는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서 영남 기타 각처 의병과 연락을 취하고 또 삼척 · 횡성 등지의 의병 세력을 모아서 재거(再擧)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6월 초에는 고성 · 양양 등지를 점령하고 군수를 처형하였다. 또한 관동창의소 포유문을 발표하여 흔들리는 민심 수습에 전념하였다.
7월 함경도 의진과 제휴하여 제2차 원산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8월 초 500여 군사를 이끌고 강릉을 떠나 회양 · 금성 방면에 진출, 격전을 벌였다. 여기에서 민용호는 그 지역에 흩어져 있던 일부 지방 의병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암의 의진이 지난 직후였기 때문에 경군과 그 지방 관군들의 경계는 매우 삼엄하였다. 이러한 주위의 정세를 살핀 민용호는 최문환 등과 함께 다시 방향을 바꾸어 함경도 쪽으로 향하여 9월 초 고원 · 영흥 · 정평을 거쳐 중순에는 함흥으로 들어가 관찰사 서리 김택수를 쫓아내고 함흥부를 차지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00명 가량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여기서도 그들의 장기 주둔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지방의 의병들을 모아 병력을 충원한 다음, 다시 북쪽을 향하여 행군하여 나중에는 강 건너 만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인석 등의 중추 세력도 해산하게 되어 평안도 지역 의병의 활동도 종식되었다.
저서로는 『복재집(復齊集)』 · 『병신일기(丙申日記)』 등이 있다.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