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윤조(允朝), 호는 퇴초자(退樵子). 판서 민영상(閔泳商)의 장남이다.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정산(定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5월 의병들을 홍산(鴻山)에 집결시켰고, 여기서부터 서천(舒川)·비인(庇仁)·판교(板橋)·남포(藍浦)·보령(保寧)·청양(靑陽) 등 충청남도 서부 일대를 점령한 뒤,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공략해 점거하였다. 이렇듯 왜병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써 을사의병 중 경상북도의 신돌석(申乭石) 진영, 정용기(鄭鏞基)·정환직(鄭煥直) 진영과 3대 전투의병으로 손꼽힌다.
홍주의병의 항일 세력은 서울과의 교통로 때문에도 일제 침략군에게는 큰 위협거리였다. 그런 까닭에 서울에 주둔하던 일군이 토벌군으로 파견되어, 5월 31일 홍주성에서 대혈전이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일군에게 잡혔다. 그 가운데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칙(李侙)·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 9명은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몸을 피해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이남규(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 1906년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남규의 집에서 모두 잡혔다. 이후 이남규 부자는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고, 민종식은 1907년 7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왕실 척족이라는 신분 탓으로 12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악형의 여독으로 1917년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