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명(惟明) 또는 유인(惟仁), 호는 우당(憂堂). 할아버지는 박영균(朴永均)이고, 아버지는 박익(朴翊)이며, 어머니는 박충민(朴忠敏)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박융도 사간 정준(鄭悛),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빈민이나 이재민의 구제)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 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憂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