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경문(經文)을 보냄으로써 비롯되었다. 이어서 백제에도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 동진(東晉)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새로운 종교의 전파와 함께 전해졌을 불상은 절에 안치되거나 승려들에 의하여 예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은 현존하는 초기의 불상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경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의 전래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뚝섬상과 같이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禪定印)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원오리(元五里) 절터에서 나온 소조(塑造) 불좌상이나,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의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그리고 역시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납석제(蠟石製) 불좌상들은 대체로 6세기의 삼국시대 초기 불상을 대표하는 예들이다.
앞서 언급된 뚝섬 불상 형식을 계승하거나 혹은 약간 발전시킨 것이다. 이들 불상들의 양식적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시 서역을 거슬러서 인도의 불상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4세기 말에 전래는 되었으나 현존하는 삼국의 불상 중에서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간다고 보이는 확실한 예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명문이 있는 불상 중에는 “연가7년(延嘉七年) 기미년의 고(구)려국……”의 기록이 있는 금동불입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연가’라는 연호는 역사 기록상에 발견되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된다. 또한 ‘기미년’이라는 간지(干支)는 불상의 양식에서 그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이 상의 가늘고 긴 얼굴형이나 법의의 주름이 양옆으로 뻗쳐 약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등이 북위시대의 6세기 초 불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서 대체로 539년에 해당되는 기미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상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중에 명문으로써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또한 출토지는 경상남도 의령이었으나 명문 내용으로 고구려의 상임이 밝혀진 중요한 예이다.
신라에서도 불교에 관한 기록이 이미 5세기 초부터 나타나나 528년(법흥왕 15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기록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절은 흥륜사(興輪寺)로서 544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이 절에는 예배 대상으로서 불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절터만 겨우 알 수 있으며 불상의 자취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 뒤 황룡사(皇龍寺)라는 거대한 사찰이 지어져서 566년에 완성되었다. 지금도 이 절터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듯이 인도에서 보내진 모형에 따라 주조되었다는 장륙(丈六)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을 통하여 이미 6세기 후반에는 신라에서도 대규모의 불상 조성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는 삼존 형식이 많으며 그중에는 명문이 있는 작품도 여럿 포함되고 있다. 즉,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의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국보, 1962년 지정)과 김동현(金東鉉) 소장의 황해도 곡산(谷山) 출토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1962년 지정)을 들 수 있다.
그 표현 양식이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각기 564년 및 571년에 해당되는 일광삼존상(一光三尊像)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불·보살상의 세부 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 혹은 연화대좌의 표현 양식에서 보면 중국의 상들보다 좀더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기법 면에서도 세부 묘사가 생략되고 투박한 감이 있다. 이러한 요소는 우리 나라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조형성의 한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석조 불상으로서
환조(丸彫)주 08)로 된 예는 별로 많지 않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浮彫)주 09)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중에서도 옛 백제 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보물, 1966년 지정)은 보살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불상이 표현된 특이한 형태이다.
서산시 운산면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1962년 지정)은 조각 수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얼굴 표정에 보이는 밝고 티 없이 웃는 자비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 불릴 만큼 특징적이다. 이 서산마애불은 불상의 왼편에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을, 오른편에는 보주(寶珠)를 두 손에 마주 잡은 보살입상을 협시로 거느린 삼존불로서 두 보살상 모두 삼국시대에 유행했던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삼존불 형식으로서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을 양협시로 거느린 도상(圖像) 역시 특이한 배치로서 한국적인 수용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보주를 양쪽 손에 마주 들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협시상과 같은 형식은 백제 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중국에서도 북조의 북위시대 불상보다는 오히려 남조 지역 출토의 불비상(佛碑像)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와 중국 남조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이미 백제의 전축분(塼築墳)이나 연화문전(蓮花文塼)의 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불교 미술과도 관련이 깊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의 불상은 대체로 부드럽고 온화한 조형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보주를 든 보살상 형식이 일본 초기 불상 조각으로 대표적인 호류사(法隆寺)의 몽전관음상(夢殿觀音像)이나 금동48체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 외에도 기록상으로나 유물상으로 많은 연관성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의 성왕 때인 552년에 불교를 전해 준 이래 많은 불상과 경전이 보내어지고, 승려의 왕복뿐만 아니라 많은 공장(工匠)과 와공(瓦工)·화공(畫工) 등이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시대(飛鳥時代) 불교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호류사에 있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은 같은 절에 있는 몽전관음상에 비하여 매우 이국적인 특색을 보여 준다. 이 점이 바로 한국적인, 아마도 백제적인 특징으로 지목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는 특히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반가사유상이란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일컫는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미륵보살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초는 싯타르타 태자가 출가하여 중생 구제의 큰 뜻을 품고 사색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점차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는 백제의 반가상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에 있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중의 반가사유보살상은 신라 초기에 속하는 중요한 예이다. 고구려시대의 반가사유보살상으로는 평양의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보살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2구의 거대한 금동반가사유보살상(국보, 1962-1 지정) 및 금동반가사유보살상(국보, 1962-2 지정)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금동불 20여 구가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상북도 봉화 출토의 석조반가사유보살상은 현재 하반부만 남아 있는데도 크기가 1.6m이다. 만약 완전하였더라면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석조상으로, 그 형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2 지정)과 같은 양식 계보임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보살상의 제작 역시 일본 불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2 지정)과는 거의 같은 형태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일본의 고류사(廣隆寺)에 있어 흥미롭다. 이 상은 우리 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절의 창건 연혁이나 불교 교류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 나라, 아마도 신라에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시되던 화랑 제도는 불교의 미륵 신앙과 관련지어져 불교사상적·역사적인 면에서 반가사유보살상의 신앙 및 그 의미에 한국적인 독특한 수용태세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말기, 즉 7세기 중엽에 가까워지면 불상의 표현에는 얼굴이나 불신의 묘사에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상의 전면뿐 아니라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는 그야말로 입체 조각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조상으로서는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이나 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경주인왕동석불좌상 등이 이 시대 양식을 잘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7세기의 석조 불상들은 대체로 신라 지역에 많이 남아 있어 비록 삼국 중 불교가 뒤늦게 공인되긴 하였으나 그 조상 활동은 7세기 전반경부터 활발히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제작된 우수한 금동불상 중에 특히 관음상이 많이 전하고 있다. 백제 규암리사지에서 나온 2구의 금동보살입상을 비롯하여 공주 근교인 의당면 송정리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968년 지정) 그리고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토의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1 지정) 및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2 지정)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상들이다. 보관 중앙에 아미타불이 있어 관음상임을 도상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당시의 관음 신앙의 유행을 아울러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금동관음보살상에서 보듯이 7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보살상 표현에서는 신체의 비례가 균형이 잡히고 세부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서 있는 자세와 늘어진 천의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조형적으로 균형 잡힌 불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규암리 출토의 보살상과 약간 시대가 늦은 선산 출토의 보살상과 비교하여 보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형상의 변화는 석조상보다는 소규모의 금동상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주조 기술적인 면에서도 많은 진전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의 불·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에 이르는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불상 표현 원칙에 있어서도 점차로 신체의 균형 잡힌 비례감, 날씬한 몸매에 조화되는 영락 장식 그리고 정면뿐 아니라 측면·뒷면의 입체적인 표현에 더욱 관심을 둠으로써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불·보살상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이상적 형태의 예배 대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두드러지고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표현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